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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여도 함께여도 좋은 여행지

발리/길리 여행기 세 번째

by Ronald
비번 절대 기억해

모처럼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났더니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았던 날. 이날은 듀벅듀벅 걷는 대신 자전거를 대여해서 다니기로 했다. 이틀 동안 길리섬의 지리는 대략 익혔으니 이제는 자전거를 타고 섬 전체를 둘러보고 싶었다. 길리에서 자전거는 24시간 단위로 대여가 가능한데 마침 숙소 앞에 대여소가 있어서 그곳을 이용하기로 했다. 처음 탄 자전거는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다른 걸로 바꿔 탔는데 자전거를 대여하면 꼭 그 자리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꼼꼼하게 확인해 보자. 새 자전거는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드디어 출바알.


길리섬은 자동차를 제외한 자전거와 오토바이, 그리고 마차만이 이동수단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걸어 다닐 때도 느긋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는데 그건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 없이 가끔 찌르릉 하는 자전거 벨 소리와 마차 소리만이 존재하는 곳. 저 멀리 뒤쪽에서 다그닥 다그닥 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면 살짝 길을 내주고 다시 내 속도로 가던 길을 가면 된다. 어제 선셋을 보러 왔던 길을 환한 대낮에 다시 찾으니 조금 다른 장소처럼 느껴졌는데 마치 이른 아침에 홍대입구를 찾았을 때처럼 서쪽 해변에선 아직 지난밤의 흔적 남아 고요함과 한적함이 느껴졌다.



건강한 한식 메뉴(떡볶이와 라면)를 보고 어리둥절했던 한국인

길리 T에서 재밌었던 건 혼자 온 여행자도 커플인 사람들도, 게다가 가족 단위로 온 한국인 여행객도 많았다는 점이었다. 요즘에는 한달살이가 유행이니 길리 같은 자그마한 섬에서 조용하고 천천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도 좋을 테고 발리/길리는 일단 유명한 휴양지니까 커플들이 많은 것도 당연히 이해가 됐지만 이 멀고 작은 섬까지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단위 여행객이 있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북서쪽으로 갈수록 한국어로 쓰인 간판이 많이 보였는데 이게 바로 윤식당 파워인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해변을 끼고 쭉 올라가서 북쪽 끝에선 티브이에서만 보던 윤식당 촬영지를 만날 수 있었는데 하여간 길리는 누구랑 와도 누군가와 함께 오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좋은 여행지인 것만은 확실했다.



동쪽으로 넘어오니 스노클링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또 한 가지 특이사항으론 유럽에서 온 여행자들이 정말정말 많았다는 점. 거리상 가까운 호주나 뉴질랜드 사람들이 과반수를 차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니다 보면 폴란드어나 독일어 같은 의외의 언어가 많이 들려왔다. 유럽에서 발리, 아니 길리까지는 꽤 긴 시간이 소요될 텐데 다들 이 먼 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싶어 조금 감탄스러웠다.


호주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유럽 여행을 다녀온 게 딱 한 번 밖에 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유럽까진 꼬박 24시간 정도가 걸린다는 걸 몸으로 체험하고 나니 그 이후로는 도무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좋은 곳은 어떻게든 소문이 나기 마련이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열정과 체력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오후 일정으론 기대하고 있던 체험 다이빙이 있는 날이었다. 간단한 안전 교육을 받고 수영장에서 연습을 한 뒤 바로 바다에 들어가는 코스였는데 입으로 숨을 쉬는 건 스노클링과 비슷하지만 낯선 장비들을 착용하고 호흡기를 통해 숨을 쉰다는 게 익숙하지 않아 몇 번이나 수영장 바닥을 딛고 일어났는지 모른다. 시작할 때만 해도 스노클링과 비슷할 테니까 문제없다고 생각했던 게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보통 오전에 두 번, 오후에 한 번 스쿠버 다이빙이 있는데 이 날 오후에 간 곳은 난파선이 있는 다이빙 포인트였다. 입수 준비를 하다가 산소통 무게를 못 이기고 얼떨결에 입수를 해버렸는데 그때 공기가 귀로 잘못 들어갔는지 초반에 이퀄라이징이 잘 안 돼서 굉장히 애를 먹었다. 수심 2~3미터 지점에서 계속 귀가 아파서 잠깐 수면 위로 올라올 정도였는데 이후에는 다행히 20m 아래까지 무사히 내려갈 수 있었다. 스쿠버 다이빙은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던 리스트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길리에서 그 목록 하나를 지우게 돼서 조금 뿌듯했다.



1일 n거북이

다만 아쉬웠던 건 이 날이 스노클링 할 때보다도 시야가 좋지 않았고 보고 싶었던 상어를 보지 못했다는 점. 다행히 니모는 만났지만 길리에서도 상어를 볼 수 있다길래 기대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난파선은 상어 포인트가 아니었다. 보통 하루에 세 번 다이빙 일정이 있고 본격적으로 다이빙을 하러 온 사람들은 이 세 번을 전부 참가하다 보니 오전과 오후 다이빙 포인트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알아버렸다. 혹시 특정 다이빙 포인트나 보고 싶은 물고기가 있다면 미리 업체와 확인하고 일정 짜는 걸 추천합니다.



마사지숍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건가요

선셋 시간에는 찜해둔 마사지 숍에서 야외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가 찜해둔 곳이었는데 바다를 코앞에 둔 작고 아름다운 가게였다. 따로 상호명 없이 Traditional Massage라고 쓰여있는 입간판을 세워둔 곳이었는데 대략적인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을 뿐 구글맵에도 나오지 않는 곳이라 다시 찾아갈 때는 역시나 좀 헤맸다. 발리니스 마사지와 롬복 마사지의 차이를 물으니 롬복이 세기가 더 강하다고 해서 스쿠버 다이빙으로 긴장했던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줄 수 있는 발리니스 마사지를 선택했다. 마사지해 주시는 분이 연세가 좀 있으셔서 압이 약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날 드디어 나의 마사지사님을 만났다는 것. 내일이면 길리를 떠나는데 왜 이제서야 저에게 이런 일이...!


해가 쨍쨍한 한낮에 야외에서 마사지를 받는 건 상상도 하기 싫지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 즈음에는 선들선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 가게가 길가에 있어서 약간 길거리에서 전신 마사지를 받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이런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이렇게 환한 곳에서 전신 마사지 체험을 해 볼 수 있겠어요.



여러분

무엇보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마사지를 받으며 끝내주는 석양을 만났다는 것. 가끔 고개를 들 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을 보는 게 황홀할 정도였는데 마사지를 받느라 사진으로는 다 남기지 못했지만 그날 마사지숍 침대에 누운 채로 선셋을 바라봤던 경험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으로 남아버렸다. 마사지가 끝나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데 아직 해가 완전히 떨어지진 않아 그 근처에서 석양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럼 길리 선셋마저 감상하실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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