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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스윙도 플로팅 조식도 없는 우붓 여행

발리/길리 여행 네 번째

by Ronald

길리 마지막 날 아침에는 자전거를 타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일출까진 못 보더라도 고요한 오전에 섬을 둘러보는 보는 건 길리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는 것과 같으니까. 가능하면 길리의 다양한 모습을 최대한 눈에 담고 싶었다. 길리 T에 머무는 내내 잘 놀기도 했고 잘 쉬기도 해서 큰 아쉬움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떠나는 날이 되니까 그렇지가 않았다. 원래 좋은 건 언제 봐도 좋고 아쉬운 감정은 누르려고 해도 잘 눌러지지 않는 법. 투명한 바다와 친절한 사람들, 바닷속에선 의외로 빠르게 헤엄치는 거북이를 본 좋은 기억들이 다음에 나를 또 어딘가로 이끌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길리 T를 떠났다. 안녕, 다음에 또 만나.



우붓에 도착하고 나의 성공 시대 시작되었지

사실 이번 여행은 길리에서 하는 워터 액티비티가 메인이었기 때문에 그 외에는 별로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그렇게 덩그러니 우붓에 도착해 버렸다. 예정보다 꽤 일찍 도착했는데 다행히 얼리 체크인이 가능했고 게다가 자쿠지가 있는 룸으로 업그레이드까지 해줘서 숙소 도착하자마자 더블 럭키 인간이 되어버렸다. 널찍한 화장실과 자쿠지를 보며 이따 저녁에 바쓰할 생각에 신이 났다. 하지만 아무리 숙소가 좋아도 우붓 첫날 숙소에만 머물 수는 없는 법이니 대충 짐을 풀고 서둘러 시내로 나가기로 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갑자기 마트로 목적지를 변경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저예요.

숙소에서 우붓 시내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 지리도 익힐 겸 천천히 걸어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점심을 먹으러 가던 중에 운명처럼 어떤 마트를 발견해 버렸고 홀린 듯 그곳으로 들어갔다. 코코마트가 일반 슈퍼 느낌이라면 Pepito는 수입 제품이 조금 더 많고 매장이 단정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칠갑농산의 칼국수면을 비롯해 일본산 두부와 발리 단골 기념품인 코코넛칩과 그레놀라까지 구성이 빼곡해서 이 날 눈도장을 찍어둔 뒤 다음 날 한 번 더 들렀다.



점심 메뉴는 인도네시아의 백반이라 불리는 나시짬뿌르.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때라 다행히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사테를 비롯해 예쁘게 구성된 사이드 디쉬들이 딱 맛보기 좋은 양으로 담겨있어서 다양한 맛을 시도해 보기 좋은 메뉴였다.



아이스 음료가 필요할 때는? 정답, 스타벅스!

길리에선 해가 뜨거운 시간에 걸어 다닐 일이 없었는데 우붓에선 대낮에 걷고 있으니 해가 뜨겁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됐다. 조금 걷다가 더위도 피할 겸 시원한 아이스 음료가 생각나서 자연스럽게 스타벅스를 찾았고 그곳에서 비슷한 심정으로 스벅을 찾은 오천 명의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잠깐 더위를 식히고 왕궁뷰로 유명한 스타벅스라 들어온 김에 우붓왕궁도 살짝 구경했다.



발리 스윙도 플로팅 조식도 관심 없었지만 대신 요가와 스무디볼은 우붓 투두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다. 예전에 친구랑 퇴근하고 요가 클래스를 다녔던 적이 있는데 요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개운함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나는 요가 사람이 아닌가 보다 하고 관뒀는데 우붓에 왔으니 그래도 요가 클래스는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선셋 요가 시간을 잘못 알고 가서 도착하니 이미 클래스가 시작된 상황이었지만 지금이라도 참석이 가능하대서 빈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요가 자체가 무척 오랜만이기도 해서 클래스 막바지에는 이탈하려는 영혼을 겨우 붙잡고 동작을 따라 하기 바빴다. 약 5년 만에 요가를 하며 내가 왜 요가를 그만두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지만 그래도 원데이 클래스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가 클래스 끝나고 나오는 길에 만난 논두렁뷰

요즘 발리 기념품으로 유명한 티켓투더문 매장이 우붓에 있다길래 잠깐 들렀다. 요즘 이 브랜드가 인기라 에코백은 재고가 있으면 일단 사둬야 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막상 매장에 들어가니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가벼웠지만(중요) 안타깝게도 디자인이 너무 내 취향이 아니어서 조용히 구경만 하다가 나왔다. 아무래도 친구들에게 못생긴 걸 선물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에겐 아름다운 것만 볼 시간도 부족하다.


이번 여행의 변화라면 이제는 돌아다니다가도 끼니때가 되면 가까운 음식점을 찾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마치 자동차 연료가 떨어지면 자연스레 주유소에 들르는 것처럼. 아직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 라며 호기를 부리다가 타이밍을 놓치면 얼마 후 이게 거대한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걸 수년간 학습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네, 저는 배고프면 일명 행그리 상태가 되는 인간이더라구요. 저도 알고 싶진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일정을 워낙 빡빡하게 짜서 끼니때를 놓치기 십상이었고 그래서 여행 가면 오후 3시가 다 돼서야 점심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근데 그 와중에 또 가고 싶은 음식점에는 가야 하니까, 바득바득 그곳을 찾아가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냥 눈앞에 있는 음식점에 가서 메뉴판을 확인하고 괜찮겠다 싶은 메뉴가 있으면 그곳에 큰 저항 없이 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서 인생이 조금 편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 우선순위가 바뀐 탓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급한 불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끄는 게 상책이다.



하여간 이 날도 관광객으로 붐비던 티켓투더문을 빠져나오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는데 바로 옆에 한 식당이 보였고 따뜻하고 얼큰한 국물 같은 게 먹고 싶어 메뉴판을 찬찬히 살폈는데 마침 간장 베이스의 누들이 보여서 이걸 먹으면 되겠다 하고 바로 식당으로 입장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맵진 않대서 그럼 프레쉬 칠리를 추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깜짝 놀랄 맛이라긴 보단 필요한 맛에 가까웠던 국수 한 그릇을 순식간에 후루룩 비워냈다.


낮에 먹었던 나시짬뿌르가 살짝 느끼해서 속이 안 좋았는데 역시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로 눌러주니 정신이 드는 기분이 들었다. 한국인은 역시 국물이죠. 그렇게 스트롱 아우라를 뿜어내며 야시장을 좀 둘러보다가 내 사랑 자쿠지가 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야외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바쓰를 했다. 커다란 근심 걱정 없이 나른하고 행복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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