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사에서 예상치 못한 알림을 받은 건 아직 오전 7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늦잠을 자고 싶단 바람과 달리 이른 새벽에 눈이 떠졌는데 다시 잠들지 못해 어두운 방 안에서 핸드폰 불빛만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왓츠앱으로 톡이 도착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뭐지...?' 발신인은 가루다 항공이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 수 밖에 없었던 건 오늘 자정쯤 가루다 항공의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서 자세를 고쳐 앉고 메시지를 클릭했다. 제발, 체크인 안내 알림 같은 친절한 안내 메시지이길 바라면서.
내용은 역시나 딜레이였다. 근데 한두 시간이 아니라 무려 7시간이나 늦춰진다는 알림. 원래 예정된 출발 시각은 다음날 오전 1시였다. 그래서 오늘 우붓에서 저녁까지 시간을 보낸 후 발리 덴파사르 공항으로 이동하여 바로 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스케줄이었는데 모든 일정이 순식간에 꼬여버렸다. 그러니까 당장 오늘 밤을 보낼 숙소를 예약해야 했고 한국에 도착하는 시간이 아침에서 어정쩡한 오후로 변경되면서 소중한 한국 휴가 하루를 날리게 될 거란 걸 의미했다. 아... 어쩐지 어제 우붓에 도착할 때만 해도 이상하게 운수가 좋더라니.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가요. 그것도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하...."
깊게 한숨을 한번 내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이 날의 딜레이가 놀랍지 않았던 건 처음 시드니에서 발리로 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도 항공사에서 스케줄 변경 이메일을 보낸 게 무척 여러 번이었기 때문이다. 변경된 시간이 드라마틱하진 않았지만 그 횟수가 너무 많았다. 여태까지 이렇게 많은 스케줄 변경을 통보하는 항공사가 있었던가. 아니, 처음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항공편 변경이 가능하려나 싶어 검색창에 가루다 항공, 딜레이를 키워드로 넣고 가늘게 눈을 뜬 채 검색 결과를 하나하나 클릭해 봤다. 그런데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도 만족스러운 보상 후기를 찾아보긴 힘들었다.
일단 노트북을 켜고 부킹닷컴으로 공항 근처 숙소를 알아보는 동시에 다른 창에서는 가루다 항공 라이브챗을, 그리고 핸드폰으로는 가루다 항공 왓츠앱을 켜놓고 대기를 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여행객들이 많았던 건지 이른 아침인데도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라이브챗 상담원과 겨우 연결이 될 수 있었다. 가장 일정에 차질이 없는 옵션은 원래의 항공편보다 출발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빠른 대한항공으로 비행 편을 바꾸는 일이었는데(가루다 항공과 대한항공은 스카이팀 소속이다.) 직원에게 현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한 후 티켓을 변경해 줄 수 있는지 묻자 탑승객 정보를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그건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런데 순간 왓츠앱 알림이 도착했다. 'Good morning'으로 시작하는 메시지였다.
라이브챗과 마찬가지로 왓츠앱도 탑승객 확인 절차가 필요했고 이어지는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모든 정보를 확인한 후에야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문구와 함께 그러니까 대한항공으로 티켓 변경을 원한다는 거지?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저쪽에선 불가능했던 게 여기라고 가능할까 싶었지만 단박에 불가능하다고 못 박진 않았으니 일단 희망회로를 돌려보기로 했다. 맞다고, 대한항공 23:45 출발 편으로 바꾸고 싶다는 의사를 다시 한 번 전했다. 가능한지 확인해 볼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답변이 왔고 그 사이 라이브챗에선 라운지 입장권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이게 정말 최선일까? 한줄기 희망을 놓을 수 없어 이쪽에는 라운지 시설에 관한 질문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거기 혹시 수면실 같은 거 있어? 같은 질문을 하면서.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 왓츠앱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래 기다려줘서 고마워. 원하는 스케줄로 티켓 변경이 가능하대'라는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예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추가비용이나 수화물 허용 범위, 모바일 체크인 가능여부 등을 확인하자 얼마 안 있어 이메일로 변경된 비행기 티켓이 도착했다. 담당자였던 Mela에게 아침에 딜레이 알림을 받고 너무 우울했는데 네가 오늘 나의 하루를 구했어! 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변경된 티켓을 확인하자 그제야 긴장이 사르륵 풀리며 허기가 몰려왔다.
청천벽력 같았던 알림을 받은 후 어느덧 두 시간 정도가 흘러있었다. 원래 계획은 아침 일찍 조식을 먹고 몽키 포레스트를 갈 예정이었지만 딜레이 소식에 뒷목을 잡고 상담원과 씨름을 한 탓에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야근을 한 것도 그렇다고 퇴근할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 조식을 먹고 오전에는 숙소에 있는 수영장에서 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퇴근은 할 수 없지만 대신 당장 뛰어들 수 있는 수영장은 코앞에 있었다.
몽키 포레스트는 조금 늦게 방문했다. 이곳의 명성은 익히 들었던지라 선글라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소지품은 백팩에 넣고 입장했다. 큰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신나게 뛰댕기는 원숭이들을 귀엽게 바라볼 수 있었고 거대하게 우거진 밀림 같은 구조를 보면서 왜 포레스트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납득이 됐다. 정글뷰로 유명한 우붓의 여러 숙소들이 떠올리며 다음번에는 그런 곳에 머무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늦은 점심으론 나시고렝과 베이비립을 주문했다. 더운 날씨에 몽키 포레스트를 둘러보느라 체력이 소진된 상태라 메뉴 두 개를 남김없이 싹싹 비웠다. 약간 대청마루 같은 곳에 앉아서 초록초록한 식물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무념무상 상태가 되었는데 시간을 더 지체하지 말고 그래도 마지막 날이니까 우붓에서 가장 가보고 싶던 곳을 가보기로 했다. 바로 뜨랑갈랑.
계단식 논뷰로 유명한 뜨랑갈랑은 우붓 시내에서 오토바이로 4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는 아니었지만 오르막 길을 계속 달렸더니 어느새 목적지 Tis Cafe에 도착했다. 제법 애매한 시간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들어가니 역시나 자리가 없어서 잠깐 웨이팅을 한 후에야 착석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그 뷰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카페 자체가 무척 아름다워서 그냥 앉아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장소였다.
다시 우붓 시내로 돌아와서 저녁은 숙소 근처에서 간단하게 해결했다. 나름대로 슬렁슬렁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하기엔 우붓에서 마사지 한 번을 못 받았다. 길리 T에선 남쪽 항구에 비해 서쪽에 있는 마사지숍이 저렴했는데 우붓은 그보다도 가격대가 낮았다. 인도네시아 여행 6일 차 정도 되니 어느새 지역별 물가 차이를 마사지 가격으로 가늠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우붓에서 덴파사르 공항까지는 거리가 꽤 돼서 오후 7시 30분에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예약해 뒀다. 공항에 도착해서 또 혹시나 딜레이나 캔슬이 되진 않을지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 딜레이로 깨닫게 된 건 담당 직원의 재량과 역량에 따라 결괏값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공항에서 더 짧은 시간을 보내고 한국에 일찍 도착하게 되었지만 역시 갑작스런 일정 변경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 게 가장 베스트다. 혹시 비슷한 일을 겪게 된다면 꼭 여러 개의 문을 두드려 보시길.
비행기는 예정대로 오후 23시 45분에 이륙해 약 7시간 30분 후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5박 6일간의 발리 여행이 마무리되었고 한국 휴가가 시작됐다. 수화물을 찾고 세관 신고서를 제출한 후에 카트를 밀고 가는데 저 멀리 게이트 너머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신나게 손을 흔들며 빠르게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나의 도시, 서울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