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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크M Jan 22. 2020

내가 굳이 전자책을 읽지 않는 이유

#3. [내가 굳이] 시리즈 _취미편


바쁘고 각박한 세상에서 굳이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 이유를 찾아 글로 풀어냅니다.
수많은 결정에 굳이 이유를 붙이고 의미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이유의 공감을 구하는 영혼이기에.


휴대가 편하고 가격도 저렴한데,
굳이 전자책을 읽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글을 글로서 향유할 수 있게 하는 최선의 질료는 종이다.


 글에는 감정이 담긴다. 작가는 말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슴에서 지어내 혈관을 따라 뇌로 흘려보내고, 그곳에서 정제된 사유(思惟)를 호흡에 실어 글 속에 불어넣는다. 일련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은 감정이 담당한다. 감정은 글의 중심축을 견고하게 지탱하여 글 쓰는 과정을 삐걱거리지 않고 진행하게 하는 구동력이다. 그렇다면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편안한 눈이 있어야겠다. 텍스트를 읽어낼 적당한 온도의 눈은 필수요소다. 직접적으로 발광하여 망막 위로 쏟아지는 빛보다는 종이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퍼지는 빛이 눈을 편안하게 한다. 소리와 함께라면 더욱 좋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종이와 종이는 맞부딪혀 마찰음을 낸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는 독서가 현재 진행 중인 상태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촉감 또한 중요하다. 나는 마음을 흔드는 좋은 문장을 만나면 그 문장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스윽 문질러 본다. 다소 감상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문장 위를 스쳐 지나가는 손 끝에 작가의 생각과 분투가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련하게 끼쳐오는 책 냄새는 어떤가. 종이가 품고 있는 쿰쿰한 냄새는 일상에서 맡는 자극적인 냄새와는 전혀 다른 층위에 존재한다. 책이 지닌 고유한 종이 냄새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다.


 눈과 귀, 코, 그리고 촉감은 '감각'으로 귀결한다. 말하자면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장치는 감각이다. 감각이 깨어 있는 독서는 작가의 감정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한다. 단언컨대, 감각적인 독서를 이끌어 글의 가치를 높여 주는 최선의 질료는 종이다.      





자발적 불편은 외려 관심과 지속을 이끌어 낸다.


 종이책은 전자책에 비해 불편하다. 마음대로 자간이나 줄 간격을 조정할 수 없고, 이미 읽은 책 중에 궁금한 부분이 있어도 즉시 찾아보기는 어렵다. 전자책은 종이책의 단점을 적당히 보완한다. 기자 출신 작가로 방송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장강명’ 작가는 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 전자책으로 바꾸고 나서 책 읽는 속도가 1.5배 정도는 빨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자간과 줄 간격, 폰트 크기를 자신이 좋아하는 형태로 설정하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자책에도 충분히 많은 장점과 편의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지식을 습득하는 일과 저자의 감각을 온전히 느끼는 일에는 어느 정도 불편함도 필요하다. 페이지를 되짚어 이미 읽었던 한 문장을 다시 읽고 밑줄을 긋는 마음,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먹고 있던 빵을 든 채 어렵사리 페이지를 넘기는 수고를 감내하는 마음, 장거리 이동을 할 때 무거운 책을 겨우 손에 쥐고 무시로 책장을 넘겨보는 분투에서 독서의 감각은 살아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말한 '자발적 고독'을 빌려, 굳이 종이책을 읽는 수고스러운 마음을 '자발적 불편'이라 일컬어 본다. 자발적 불편은 더 많은 지식을 탐하게 만들고 저자의 감각을 되짚어 보게 한다. 스스로 선택한 편리성의 기피는 오히려 독자를 독서의 세계로 끌어당겨, 페이지 밖으로 튀어나갈 것처럼 펄떡이는 활자들의 춤사위를 용인하게 만든다.





한 권의 종이책에는 출판 담당자들의 온전한 마음이 모인다.


 종이책 한 권이 출판되는 과정을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애정과 보살핌이 투여되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원고 구성 및 화면(워드) 교정 교열, 본문 디자인, 교정지(통상 3교), 표지 디자인, 인쇄, 제작까지 대표적인 절차만 나열해도 수많은 노력이 상상된다. 우리는 보통 책을 고를 때 제목과 저자, 출판사 등 단편적인 정보만을 보고 고른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는 여러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 독자의 결정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출판 마케팅에서는 ‘3T’가 중요하다고 한다. 3T란 ‘시기(Timing), 대상(target), 제목(Title)’을 일컫는다. 물론 세 가지 요소에서 출판 마케팅이 출발할 수는 있지만, 3T가 전부는 아니다. 제목에 부합하는 디자인을 결정하는 일, 대상에 맞는 판형과 장정(裝訂)을 고민하는 일, 출간 시기에 맞는 띠지를 입히고 홍보전략을 수립하는 일, 이 모든 일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과정에 출판 관계자들의 땀과 고민이 서린다. 어떤 노력은 손끝에서 혹은 눈에서 시작되고, 발바닥에서 피어난 땀에서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작가에서 시작된 글이 독자의 손에 오기까지 거쳐간 수많은 애정의 손길은 온전히 책 한 권에 담긴다. 책을 손에 잡는 순간 출처 없는 온기와 책 냄새가 화악 다가오는 이유는 하나로 뭉쳐진 노력들에 있다. 전자책에서는 도무지 느끼기 어려운, 마음들이다.





소장하는 자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종이책은 소장 욕구를 자극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 만한 도서 격언이 하나 있다. ‘미(美) 중의 미는 세트미’라는 말인데, 세트로 구성된 책을 책장에 나란히 꽂아 놓으면 아름답다는 의미이다. 소장용 도서라는 말은 그렇게 탄생한다. 이를테면 '민음사'의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집, '문학동네시인선', '위고'의 '아무튼 시리즈' 같이 세트로 된 도서는 책장 한 편에 세워 놓으면 보기만 해도 흐뭇해진다. 디자인이 화려한 책뿐만 아니라 책의 가치를 고려한 양서로 가득 채운 책장은 지인을 초대해 자랑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물론 자랑보다는 혼자 책장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종이책은 또한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기에도 좋다. 낭만적이지 않은가. 책을 선물하는 마음에 깃든 고민과 관심, 그리고 애정까지. 책을 선물 받은 사람에게 책은 단지 하나의 사물로서 존재하기보다는, 추억을 담은 일종의 오브제(objet)가 된다. 선물 받은 책을 펼쳐볼 때마다 그와의 추억을 향유할 수 있다. 앞면에 저자 친필 사인이 있거나 책의 한 귀퉁이에 선물하는 사람의 글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선물하기 애매한 전자책으로는 이런 낭만을 선사하기 어렵다.





종이책의 특성은 서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극대화된다.


 전자책은 만남을 단절한다. 온라인으로 책을 구매하고 다운로드해서 읽으면 그만이다. 전자책을 통해 누군가를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렵다. 반면 종이책은 만남을 조성한다. 독자는 종이책을 구매하거나 뒤적여 보기 위해 서점에 간다. 하여 우연이든 필연이든 책을 통한 만남의 주요 매개체는 서점이 된다. 책 내음으로 가득한 그곳은 사람 내음 또한 가득하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기도, 소규모 북토크에서 만나 친해지기도 한다. 책에 사인을 받으면서 심지어 저자와 독자가 친해지기도 하는 마법적인 공간 역시 서점이다. 전자책에 사인을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소극적인 성격이라 이런 만남이 불가능하더라도, 적어도 서점 주인과는 친해질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일본의 유명 동네책방인 '사와야 서점'의 점장 '다구치 미키토'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손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럼 다시 서점에서 만났을 때 관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단골로서 인사만 짧게 나눠도 마음이 편해진다."
 (다구치 미키토,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동네서점>, 홍성민 옮김, 펄북스, 2016, 177쪽)


 특히 동네책방은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흐르고 모이는 곳이다. 책을 아끼려는 순수와 지적 탐구심이 합일을 이루는 공간, 어지럽힐 수 없는 투명한 상상이 자유롭게 흐르는 장소, 나는 동네책방 외에는 그런 공간을 찾지 못했다. 종이책의 특성을 ‘만남’이라는 이름으로 극대화시켜주는 공간이 서점이다. 서점과 종이책으로 가득한 내 마음에는 도무지 무미건조한 전자책이 끼어들 틈이 없다.





모든 이유의 중심에는 ‘물성(物性)’이 있다.



 전자책을 읽지 않는 모든 이유는 결국 ‘종이책의 물성’을 떠나서는 당위성을 갖기 어렵다. 여기, 내가 생각하는 물성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이야기를 끝으로 내가 '굳이' 전자책을 읽지 않는 이유의 공감을 구해본다.


 “웬만한 책은 반드시 구입해서 만져요. 돈? 많이 들죠. (웃음) 안 만진 사람은 모르는 거거든요. 일단 제 돈을 들여 사본 사람만이 아는 거거든요. 맞다 아니다 판단하려면 반드시 사서 손에 쥐어봐야 해요. 책에 있어서 전 감보다 손을 우위에 둬요.”

(은유, <출판하는 마음>, 문학편집자 김민정 인터뷰, 제철소, 2018, 51쪽)






[내가 굳이] 시리즈 #3.

내가 굳이 전자책을 읽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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