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ish Talk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르 Mar 28. 2019

선한 존재





06. 세 번째 남자와 네 번째 남자    

    



 여자가 세 번째 연애를 시작한 건 우연한 기회였다. 잡지사 막내 에디터로 일할 때었다. 제품 촬영을 하다가 테스트 컷을 찍겠다며 우연히 포토그래퍼 a의 카메라 앞에 서게 되었고, a는 카메라 앵글 안에 여자를 담았다. 여자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진기 앞에서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를 도저히 몰랐다. 사진을 찍힌다는 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셔터 속 카메라 앵글 안의 자신을 응시해야 하는 일. 그녀는 정확히 언제이었는지 모르겠으나, 학창 시절 우연히 증명사진을 찍으러 들어간 사진관에서  "학생, 엄마랑 안 친하죠? 엄마랑 안 친한 친구들이 실물보다 사진이 잘 안 나오더라? 친구 참 사진 빨이 안 받네!?" 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그 사진사 아저씨의 말은 왠지 진짜 인 것만 같았다.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사진 빨이 안 받는다'라는 이상하지만 정말인 것 같은 이야기. 그때부터였을까? 여자는 카메라 앞에서서 사진을 찍는 일이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 아이라는 걸 들키는 일인 것 만 같아 사진을 찍는 그 찰나가 식은 땀이 날만큼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a가 그녀에게 "카메라 앞에 한번 서봐요"라고 말을 건네 왔다. 여자는 손을 절레절레 휘젓다가 분위기상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여자의 시선은 어느 곳을 향해야 할지 몰라 빈 천장을 향했다가, 여자가 오늘 신고온 운동화의 더러워진 발끝 부분을 행했다가, “여기보세요” 라는 a의 목소리에 얼굴을 들어 카메라 뒤 a의 비쭉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발견하곤 그곳을 바라보았다. a는 셔터를 눌렀다. 


'찰칵 - ‘    



 카메라 앵글 속 여자는 여전히 불안했고, 시선은 흔들렸다. 그날 이후, a는 여자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을 전해 주고 싶다며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왔다. 여자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a가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을, 여자는 a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약속을 잡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a는 돌싱, 이혼남이었다. 여자와 개인적으로 만난 첫 식사 자리에서 a는 자신에게 여섯 살 난 딸이 있다며, 아이는 아내가 아닌 자신이 키우고 있고, 일을 해야 하는 시간엔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여자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대체 a는 무엇이 여자에게 미안했던 것일까? 여자는 그가 이혼남이어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껏 그래 왔듯 자신의 인생을 타인과 완벽히 융합할 , 그런 인생을 감당할 능력 같은 건 여자는 타고나지도, 갖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a의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을 다하는 말 같지만, 그 말은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의 갖가지 수 중 하나 일뿐이라는 걸 여자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a가 이미 한번 해본 일에 또다시 자신을 완전히 걸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그때 느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남자가 a이기 때문에 여자는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지 않아도 되며, 자기 생활을 잃어버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안도감, 편안함 같은 걸 느꼈다. 하지만 어쩐지 a와의 연애는 불안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는 걸 여자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여자 머릿속 한편에서 '어차피 이런 류의 만남은 금세 끝나버릴 표면적인 만남' 이 될 가능성이 클 거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상대를 피하는 것. 여자는 연애를 할 때마다 그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종종 주문을 걸듯 마음속으로 말을 하곤 했다.        


'진짜 사랑에 빠지면 곤란해. 

과연 그가 나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가 진짜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동안 여자를 스쳐간 대부분의 연애의 시작은 참을 수 없는 외형의 얕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남자들은 여자가 예뻐서 좋았다. 그녀가 가진 성격적인 결함, 잘 웃지않는 표정 같은건 여자가 가진 큰 눈과 비교적 예쁘장한 얼굴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새침한 외모에 비해 툴툴거리고 낮은 목소리를 가졌고, 매번 완전히 다 나를 보여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기에 남자들은 여자를 한 번쯤은 찔러봤다. 하지만 여자는 정말로 자신을 완전히 다 보여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진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 단 한 번도 그렇게 살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외형의 얕음으로 시작된 연애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혼자 남겨진 여자가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 괴로울 때면, 자신을 껍질 속에 꽁꽁 가둬버리고는 또다시 외형의 얕음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a도 다르지 않았다. 여자의 카메라 앵글 속 예쁘장하지만 수를 부릴 줄 모르는 것 같은 얼굴에 반했다고 했다. 연애를 하면 할수록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 삶에 지치면서도, 여자는, a가 여자를 사랑해주는 느낌, a가 여자를 원한다는 느낌, a가 여자를 안아주는 느낌, a와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는 느낌, 그러한 것들이 너무 좋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a와 연애를 하면 할수록 여자는 어떤 게 진짜 자신의 모습인지 의문을 갖게 되는 나날이 많아졌다. 


 진짜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안 될 것 같은 타이밍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어느날 a는 여자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외형으로 시작된 연애가 내면으로 파고들수록 그것은 서로가 힘들어지는 만남이라는 걸, a는 여자에게 여자를 만나면 만날수록 자신의 딸과 자꾸만 겹쳐 보인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     


"우리는 더 깊어질 수 없는 관계야. 그만 하자."


 '더 깊어질 수 없는 관계'. a의 그 단어 선택이 어찌나 적절했는지, 여자는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표면적인 만남의 종말. a와는 그렇게 끝이 났다. 여자에겐 세 번째 남자였다.     










 세 번째 연애가 끝나고 여자는 식이장애에 시달렸다. 이별은 언제나 힘이 드는 일이었다. 떠나간 이는 시간이 지나면 잊히지만, 이번 연애에서도 여자가 실패자라는 억울함은 이겨내기 힘든 감정이었다. 여자는 위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쓰디쓴 위액이 목까지 올라오는 날들이 많았다. 위장병이 나을 때까지 병원 생활을 하다 반년에 가까운 시간을 은둔형 외톨이처럼 집에서만 지냈다. 한번 시작된 위장장애는 감정의 기복에 따라 통증을 유발했다가 입맛을 완전히 버려놓기도 했다. 여자가 더욱 완벽한 예민 주의자로 거듭나려 하던 시점, 생각지도 못했던 초등학교 시절 친구에게 연달아 문자 메시지가 왔다.     

   

"잘 지내지? 나 작업실 계약했어! 

다음 주 토요일에 조촐하게 사람들 몇 명 초대해서 오픈 파티? 같은 걸 할까 해. 

내키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돼. 오면 더 좋겠고^^!"     


 여자가 이혼남을 만나다 헤어졌다는 것도, 식이장애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동창 친구였다. 하지만 반년 만에 그녀에게서 온 메시지는 지나치게 쿨하고, 지나치게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이었다. 여자는 왠지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흔쾌히 가겠다고. 주말에 보자고, 메시지에 답장을 했다. 그 주 주말, 여자는 반년 만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여자는 반년 만에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 말을 나누고, 앉아 웃고 떠들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반년 만에 술을 마셨다. 사실 그것은 정말로 사실이었다. 그녀에겐 아무 일도 없었다. 그 자리에 앉아있는 그녀는 그래야만 했다. 왁자지껄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떠들고 웃는 자리에서 마치 어떤 일이 있었던 사람처럼 구는 것만큼 불쾌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여자는 아무일도 없다는 듯 웃고, 마시고 떠들었다. 반년 만에 마신 술은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 감각들을 깨웠다. 여자는 자신의 심장이 고장 난 건 아닌지, 온몸이 벌겋게 변하고, 심장소리가 얼굴에서도 손에서도, 가슴에서도, 발끝에서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그 모임에 온 사람들은 여자의 반년 동안 행적에 대해 캐묻거나 '왜?' 냐고 묻는 이가 단 한명도 없었다. 인생의 개인적인 불편이 무엇인지, 혹은 타인의 삶에 크게 좌지우지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는 것 만 같았다. 호탕하게 술잔을 비우고, 호탕하게 웃으며, 별 것 아닌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 곳에서 큰 키에, 멀끔한 얼굴, 하얀 피부, 키도 크고, 손도 크고, 발도 큰 남자. 술도 제법 잘 마시던 그에게 여자는 자꾸만 눈길이 갔다. 아마도 그가 멀쩡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말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언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같은 음절을 반복하고, 더듬더듬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더듬는 말소리와는 상반되게 남자의 눈에는 장난기가 너무 많아서 그녀는 계속해서 그 사람의 눈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그때 알았던 것 같다. '소년의 마음을 가진 남자. 여자에게 꽃 선물을 할 줄 모르는 남자. 여자의 슬픔을 모른 채 할 수 있는 남자. 쉽고도 어려운 남자. ' 그 후로도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더듬었고, 여자는 모임이  끝나 모두 집으로 돌아가려는 시점,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전화번호 물어봐도 돼요?" 

반년 만에 여자는 너무 쉽게 네 번째 연애를 시작했다.    

 

 말을 더듬는다는 건, 어떤 종류의 불안일까? 여자는 네 번째 남자를 만나러 가는 길 마다 똑같은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의 겨를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자는 연애에 진지하지 않았고, 여자에게 달콤한 말도 하지 않았다. 시시콜콜 자신의 하루를 읊조리는 일도 없었다. 그저 만나면 얕은 농담을 하고, 웃지 않는 여자를 향해 웃고, 여자를 안아주고, 깊음과 얕음을 재지 않았다. 여자에게 자신을 사랑 하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여자는 왠지 모르게 그가 좋았다. 그는 여전히 말을 더듬었고,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헤어지면, 친구들을 만나 밤새 술을 마시고, 밤새도록 놀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곤 했다. 말을 더듬던 남자는 자기가 누군지 잘 모르는 여자를 만나 더듬던 자신의 언어들을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말을 더듬던 그가 여자를 만나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기 시작했고, 1년 3개월의 연애 끝에 그녀는 그의 아기를 가졌다.      

   

"아기가 생겼어. 6주래. 어쩌면 좋을까?" 여자가 물었다.

"결혼하자. 남자는 대답했다.    


그와 여자는 아기가 생기고 3개월 만에 결혼 준비를 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여자는 아기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턴 자신이 그동안 가졌던 모든 예민함을 멈추었다. 자기 안에 자라나기 시작하는 아기라는  '선한 존재'에 대해 자신의 악함이 조금이라도 더해지면 안 되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책을 보고, 좋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고, 남편 된 남자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며 요리를 했다. 네 번째 남자는 선한 존재였다. 연애 때문에 단 한 번도 목 놓아 운 적 없던 그녀를 울게 만들었고, '엄마'라는 존재를 혐오했던 그녀를 '엄마'라는 위치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었다. 완벽한 예민 주의자였던 여자의 예민함을 완벽하게 깨트려 버린 사람이었다. 평생을 '보통의 삶'을 꿈꾸던 그녀를 '보통의 범주'에 넣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여자는 남자처럼 , 뱃속의 아기처럼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의 이중성을 최대한 발현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렇게 '아내'가 되어가고, '엄마'가 되어갔다. 선한 의도가 누군가에게는 선함으로 다가오지 않고, 선한 존재가 누군가에겐 악인보다 더 힘든 상황들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여자는 그때에는 알지 못했다.


 네 번째 남자는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네 번째 남자를 만나고 여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가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이 가슴속에서 몰려와도 여자는 꾹꾹 참아냈다. 그 순간 슬퍼하기 시작하면 평생 울음을 그치지 못할 것 같았다. 여자는 평생 울다 죽는 것보다는 슬픔을 꾹꾹 누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모두 다 그렇게 산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것이 진짜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내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를 여자는 별일 없이 보냈다. 별일 아닌 삶 속에서 늙는다는 것이 마치 형벌인 것처럼 여자는 그렇게 시간을 살아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여자는 그것이 슬프면서도 좋았다. 어서 빨리 늙어서 사라지는 인생을 살게 되다니, 꿈만 같았다. 여자가 세 번째 연애를 끝냈던 스물셋에는 어서 서른만 돼도 좋겠다고 생각 했다. 네 번째 남자의 아이 엄마로 살던 서른 즈음엔 어서 마흔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흔이 되고 50대, 60대, 70대가 되어 어서 빨리 늙어서 이 인생이 사라져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 했다.     


 네 번째 남자는 그와 그녀가 서로 다르며, 어떤 방법으로도 서로의 본심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와 결혼을 한 남자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을 여자에게 직접 말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한참을 생각했다.        



"생각하지 말자. 

그처럼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는 습관을 들이자. "                 









 






매거진의 이전글 보통의 삶을 사는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