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부터 12월엔 꼭 한 편씩 공연을 봤다. 시작은 12월에 있는 친구 생일에 선물 대신 함께 볼 공연을 예약하면서부터였다. 이후로 그녀의 생일주간 연례행사가 됐다. 작년엔 특별한 정보없이 선택한 연극이 우리 둘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은 덕분에 공연장을 나섬과 동시에 재관람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몰입의 감정선이 비슷했다. 남들이 보기엔 '저기에서까지 빠져든다고?' 의아해 할 부분에서도 이미 빠져 있었다. 작품에 몰입하면 종종 개연성도 무시됐다. 그냥 다 괜찮았다. 누가 논리로 봅니까 등장인물이 그렇다면 그런거지. 우린 서로에게 좋은 관람메이트였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좀 더 쉽게, 많이 울 수 있는 눈물샘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이번 연극에서 만장일치로 만점을 준 부분은 감동과 재미였다. 동일한 역할을 다른 배우가 맡으면 어떤 새로운 재미가 생길까 궁금했다. 대부분이 낯선 배우들이었지만 몇몇은 믿고 보는 낯익은 얼굴이라 그 중 한 배우가 주연인 날로 재관람일을 잡았다.
무대 위의 그는 무척 노련했다. 말재간이 좋고 애드립도 강해 대사를 유연하게 자기 식으로 고쳐 말했고 중간중간 자신의 매력이 돋보일 수 있는 유머코드도 많이 넣어 유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공연은 하나의 유기체다 보니 배우 한 명이 바뀌어도 확실히 극의 느낌이 달랐다. 지난 번에는 쉬운 눈물샘이 역시나 쉽게 터졌는데 이번에는 작동하지 않았다. 조금의 즙이 나오긴 했지만 아는 내용에 감정도 준비돼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역시나 많이 웃었고 즐거웠다.
공연장을 나오며 ‘재밌었다’고 동시에 외쳤지만 나의 관람메이트는 이번 회를 먼저 봤다면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까진 안 했을 거라고 했다. 공감했다. 그렇다면 몰입이 가벼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지난 회에서 내내 ‘인물’에 빠져 있었다. 그의 마음에 쉽게 업혔고 말과 행동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번엔 달랐다. 자꾸만 ‘배우’가 보였다.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돋보이니 감정의 일체화보다는 객관화가 쉬웠다. 사람의 기호는 저마다 다르므로 우리의 평 역시 지극히 주관적이겠지만, 두 배우의 작품 이해도가 동일하다고 봤을 때 작품과 인물에 대한 배려가 더 세심했던 쪽은 전자(전 회차의 배우)인 것 같았다.
그는 엄청난 재간둥이는 아니었다. 주어진 대본을 최선을 다해 씹어먹은 쪽에 가까웠다. 때론 투박한 표현이었지만 묵직한 진심이 자꾸 마음을 건드렸다.
야너두 말할 때 내 목소리 내니?
나는 늘 말잘러가 되고 싶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말잘러가 돼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발표를 시킨 선생님 앞에서 울어버리는 바람에 1년 내내 발표 프리패스로 지낸 적도 있었다. 남 앞에서 흔들림없이 또박또박 내 의견을 말하는 건 지상최대의 공포였다. 아직도 그 떨림은 극복이 안된다. 청자가 많을수록, 낯선 이가 많을수록 나는 늘 염소소리를 낸다 메에에에에.
어느 날 친구에게 나의 오래된 소망을 털어놨다. “나 진짜 남 앞에서 논리정연하고 당당하게 내 의견 말하는 사람되고 싶은데, 천성이 쫄보라 너무 극복이 안된다. 슬퍼.” 그러자 친구 왈, “너만큼 매번 진심으로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 사람들한테 그 진심이 다 전달되잖아. 노련한 강사들 봐. 너무 노련해서 사람들이 진심처럼 안 느낄 때도 많다고. 아마 그들은 그게 딜레마일걸?”
“그건 맞지.” 수긍하면서도 인간은 원래 갖지 못한 것을 더 크게 탐하는 법이니까. 연극을 보고 나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노련하다고 진심이 없는 건 아닌데. 투박하다고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 건 아닌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노련미 몇 스푼, 진심 몇 스푼 정량으로 정해져 있다면 참 좋겠지만 자신에 맞게 버무려야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것이니 그렇다면 난 어떤 말하기를 해야 할까.
‘배우’가 돋보이면 ‘인물’이 덜 돋보이듯,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돋보이려면 ‘화자’가 돋보이려는 욕심은 내려놓는 것이 좋겠다.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청자의 마음을 진심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간절함’에 노련함을 살짝 얹는다면 더없이 좋겠고. 노련함을 키우기 위한 방법은 또다른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