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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sory Mar 29. 2020

부끄러움.

A는 나의 책메이트다. 나는 A와 대화하는 일이 즐거웠다. 재미를 넘어서서 A와 이야기한 날은 찐대화를 했다는 충만함이 느껴져 좋았다. 우리는 많은 부분이 달랐으나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코어는 무척 닮아있어 마무리는 대부분 동일한 방향으로 아름답게 귀결됐지만, 그러기까지의 여정은 꽤나 치열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한 달에 한 권씩 같은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눈지 벌써 1년이 훌쩍 넘었으니 이 강제성 없는 팀플을 성실히 지속할 수 있었던 건 서로에 대한 굳은 믿음과 대화의 재미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몇 달 전 우리는 등장인물들이 쏟아지는 소설을 읽었다. 그냥 우르르 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이 많은 인물들에 서사의 균형감을 섬세히 부여한 작가님 덕분에 인물 얘기만 해도 할 말들이 넘쳐났다. 인물에 입체감이 생겨날수록 누구 하나 쉽게 판단할 수 없었고 개중에는 나와 닮아있는 인물도 존재해 마음이 더 쓰이기도 했다. 한참 정신없이 얘기를 나누다 A는 등장인물 B의 서사에 대해 언급했다.


B는 대학시절부터 옅은 우울증이 있었는데 그런 B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절친한 C 덕분에 꽤 안정적으로 지내다가 C가 퇴학당하는 결정적인 사건 이후로 방황하다 대학생활을 이어가지 못한다. 몇 십년 후 B가 몇 번의 자해를 시도했고 불안정한 삶을 살다 결국 삶을 놓고 말았다는 비보가 동창들에게 전해진다.


A는 우울증을 갖고 있지만 삶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부분의 서사에서 우울증과 자살을 당연한 인과관계로 놓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그러한 귀결 말고도 다양한 삶들을 그릴 수 있을텐데 우울증에는 유독 그런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나는 당연히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확률이 높은 것은 사실이니 그런 면에서 인과관계로 크게 문제가 있진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A는 동의하지 않았고 비난과 비판을 잘 구분하자고 말하면서도 심적으로는 비판이 내 의견이 아닌 '나'를 부정한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했던 나는 A에게 좀 서운했던 것 같다. 그래서 A가 하는 말에 '아닌데?그건 좀 과한 생각 같은데?'라는 마음으로 괜한 오기를 부리며 내 의견이 틀리지 않았음을 지키고 싶었던 것도 같다.


사실 당일엔 이 못난 마음을 볼 수 없었고 그저 좀 아쉬웠다. 시간이 지나야만 객관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진실들이 있으니, 내 못남이 수면 위로 등장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 이후로 어떤 서사를 볼 때마다 A의 말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그게 진짜 당연한 게 맞나?'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은 무엇인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말들이 계속 내 발목을 잡았다.


못남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A가 나보다 더 섬세하게 무언가를 봤다는 게 질투가 났던 것도 같다. A가 예리하게 본 것을 나는 당연하고 무디게 봤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부끄러워 괜히 목소리를 더 높였다는 것이 가장 큰 진실인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중시하던 자존심이 A가 제기한 문제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완전히 마이너스일 것이다.


우울증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으면서, 우울증과 자살이 가까운 인과관계라고 여기며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을 안타깝게는 여기되 어쩔 도리가 없었던 일 혹은 어떻게 살 수 있었겠냐는 말을 내뱉는 자체도 엄청난 폭력이었는데. 이 인과관계의 고리를 당연하게 보는 사회적 시선이 많아질수록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겐 그 선택지가 굉장히 가깝게 느껴질 수 있겠다는 것 역시 너무도 큰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직도 많이 무디고 모자라다. 머리에서 걸러진 생각으로 입으로는 올바른 소리를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마음에 닿은 생각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어렵고 혼란스러운 사안들도 존재한다. 잘 모르겠는 일들이 생겨나면 생겨날수록 나의 이중성이 아프고 괴롭다. 이런 부족한 나라서 주변에 최대한 섬세하고 예민한 친구들을 두고 열심히 채찍질 받으며 살려고 한다. A 역시 그런 친구 중 하나다. 내가 못나고 못된 마음으로 시야가 뿌얘지는 일 없도록 도와줘서, A가 나의 도끼가 되어줘서 고맙다.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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