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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sory Dec 29. 2020

마음의 조각들.

1. A는 절친한 친구를 만들고 싶은데 그런 관계를 쌓기엔 시기가 너무 늦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학창시절에 만들었어야 할 관계를 이제야 만들려니 쉽지 않다며 과거의 자신을 애잔해했다. "아냐, 그렇지 않아요." 몇 년 전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제는 진짜 친구로 서로의 현재를 깊이 공유하게 된 경험은 그의 말에 반기를 들고 싶게 했다. 


"시간이 쌓아올린 단단함도 중요하겠죠. 하지만 시간과 관계의 깊이가 늘 비례하는 것 같진 않아요. 어떤 얘기를 나눌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에게 결코 늦지 않았다고,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꾸릴 수 있다고 용기를 주고 싶었다. A는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말이 제대로 가닿지 않았음이 느껴졌다.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면 '맞지 맞지. 그래그래 너무 좋은 말이다' 싶지만 책을 덮는 순간 '좋은 말인 건 알겠지만 쉽지 않은 소리'라며 거리두기를 해버리곤 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너무도 다른 차원의 얘기니까. 그에게 내 말은 자기계발서 속 구절같이 여겨지는 것 같았다. 나는 늦지 않았고 관계설정을 위한 노력을 해보라며, 관계는 의지와 용기라고 계속해서 얘기했으나 그는 좋은 얘기지만 이제 와서는 너무 늦었고 쉽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존재했지만 서로의 말을 흡수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왜 좋은 걸 얻지 못한다고 속상해하고 있지?' 좋은 관계를 두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짠하게 여기는 한편 미래에는 그 관계가 쌓여있길 바라는 그에게 현재는 없는 것 같았다. 그날의 대화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내내 찝찝했다. 이 찝찝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그가 깊은 고민을 털어놨다 여겼다. 그토록 간절히 갈망하는 것에 대해 내가 건네줄 답변이 있다면 어떻게든 전달해주고 싶었다. 그가 나의 말을 통해 변화하길 바랐던 것도 같다. 그 변화를 만들어낼 나를 바라보는 일이 좋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계속해서 튕겨냈고 그때마다 마음 속에서 '노력'과 '자격'이란 키워드가 튀어나왔다. 노력해야지, 그걸 꺼내놓을 자격이 되려면. 


찝찝함을 성찰하고 나자 이런 오만한 마음으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 싫었다. 내가 그런 마음을 가질 '자격'이 되는가. 자격론은 결국 내게 돌아왔다. 상담 선생님에게 털어놓자 선생님은 "내가 A를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A의 고민을 넘어서는 경험을 이미 해봤기 때문"이라 하셨다. "자기보다 '낮게 보는 것'이기도 하죠"라고도 하셨다. 윽. 정곡. 하지만 도덕을 중시하는 나에게 그런 마음은 죄책감을 갖게 할 것이라는 정확한 분석까지 내어놓으셨다. 


다 맞았다. 노력과 자격을 중시할수록 타인에게도 그런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댈까봐 두려웠다. 이렇게 고집스런 꼰대가 되는 것일까 겁도 났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마음 갖는 사람은 절대 꼰대가 될 수 없으니 걱정 말라고 하셨다. 이후로 A를 볼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났다. 


최근에 A에게 문자가 왔다. A에겐 관계에 대한 또다른 고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건넨 말들이 맞다고 하면서도 끊어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해냈다고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자기가 너무 괴롭혀서 미안하다고. 그 말에 내가 더 미안해졌다. 


사람은 다 각자의 속도가 있다고, 결국 늦든 빠르든 행동하게 되는 시점이 오게 된다고 생각했다. 관계에서 '기다림'만큼 대단한 미덕은 없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경험에 적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 조바심과 답답함이 관계를 해친다는 것을, 서로의 언어를 외국어처럼 들리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에구, 고생했어요. 마음은 괜찮아요?"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물었다. 이제야 그를 진짜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도 당연히 알고 있는 것들이었음을 안다. 다만 그것에 끌어모을 용기가 아주 천천히 쌓이고 있어서 타인이 보기엔 늘 제자리 같았을 수 있다. 마음 속으로는 수없이 시뮬레이션 해봤을 결단을 실제로 행하게 됐을 때 그제서야 털어놓게 된 해묵은 것들이 그에게도 얼마나 큰 해방감을 줄 것인지도. 


그는 후련하다고 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마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 번엔 좀 더 빠른 결단이 가능해질 수도 있겠지. 용기 낸 경험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 갖는 단단한 힘을 믿는다. 타인의 속도를 더욱 살피고 기다려주는 마음이 섬세하게 쌓여가길, 이 마음을 잊지 않는 No망각의 동물이 되길 나에게 간절히 바란다.


2. 오랜만에 B와 밥을 먹었다. B의 행복 서사를 듣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그를 봐왔지만 지금이 가장 안정적이고 행복해보였다. 남의 일에 이렇게 찡할 수 있나. 나는 마음이 시큰해서 오바스러운 제스쳐를 취하며 눈물을 삼켰다. "너무 감동적이네." B는 자기 행복을 잘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타인의 행복을 잘 그러모으며 살고 싶다. 남의 일을 내 일처럼 반갑게 여기는 버릇을 열심히 들여놓고 싶다. 그런 마음이 현재의 그가 품고 있는, 그도 깨질까 무서울 만큼 벅찬 행복을 잘 지켜낼 수 있는 나만의 주문이 된다고 믿는다. 언젠가는 무너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행복했던 순간을 나 뿐만 아니라 타인과도 공유해두는 것은 경험 외장하드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니까. 


그때 네가 얼마나 예쁘고 좋아보였는지, 그 순간들의 네 모습을 내가 얼마나 기쁘게 지켜봤는지 잘 기억해주고픈 마음을 놓지 않고 싶다. 무너지는 순간에는 또 잘 지켜보아주면 된다. 작은 마음들이 어느 때보다 크고 강력하게 다가올 때가 있지 않은가. 서로가 지켜내는 마음의 힘을 나는 무척이나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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