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읽고 나면 '아! 나도 글 쓰고 싶다'는 열정이 훅 샘솟거나 '나는 평생 이런 글은 절대 못 쓸 거다'라는 경외감이 생기곤 한다. 전자든 후자든 내 마음에 제대로 꽂힌 글이기에 드는 마음이지만 전자의 마음이 부풀어오르는 날엔 뭐라도 써내려가야겠다는 의욕에 오늘 책 한 권 완성할 기세다.
그런 글을 흉내라도 내볼 욕심이 나는 건 소재가 주는 친숙함 때문일 것이다. 내 주변의 이야기가 이토록 근사한 글감이 될 수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은 나의 묵혀둔 일들에게도 언어를 부여해주고 싶게 만든다. 그런 영역 중 하나는 '학교'다. 내게 가장 익숙한 공간이자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나는 글감의 천국.
교사가 된 뒤 생긴 꿈 중 하나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을 소재로 한 꾸준한 글쓰기를 책으로 엮어내는 것이었다. 지금도 SNS를 통해 종종 글을 쓰곤 하지만 부지런하지 못한 탓에 글로 풀어내지 못한 마음들이 정돈되지 못한 채 쌓여있을 때가 있다. 그래서 이 부지런한 성찰의 과정을 힘있게 해낸 분들의 결과물을 살펴볼 때면 경건한 마음으로 삶의 자세를 고쳐잡게 된다.
최근 인스타 피드에서 김소영 작가님의 책 '어린이라는 세계' 극찬을 많이 봤다. '이렇게까지 좋을 수가 있다고?' 싶게 애정어린 호평이 쏟아지는 걸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내 미래의 책과 겹치는 영역이잖아(?) 작가님의 세계가 궁금해져 장바구니에 서둘러 담아뒀던 날, 우연히 옆반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다 책 얘기가 나왔고 선생님은 이미 보셨다며 빌려주시겠다 했다. 올레!!
내가 사뒀으면 구입할 때는 애정 듬뿍 받고 배달왔으나 빠르게 식은 관심으로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먼지만 쌓여가는 우리집 책장의 수많은 책들 중 한 권으로 대기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치만 빌린 책에는 여유를 둘 수 없으니 가장 우선순위에 놓고 열심히 읽었다. 네 개의 에피소드를 읽었을 땐가. 나는 이 책이 무조건 좋을 것이라는 아주 강력한 확신을 얻었고 얼른 다 읽어야 감상평을 쓸 텐데 아직도 한참 남았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와 만났던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이 떠올랐고 그들에게 내가 마이나스인 인간은 아니었길 간절히 바라며 읽었다. 김소영 작가님은 내가 거쳐온 세계라고 쉽게 보지 않는 겸손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대한 존중의 태도가 깊은 분이었다. 어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소중히 품에 안고 가야 하는 섬세한 마음들을 최선을 다해 끌어모으고 살아갈 줄 아는 분이기도 했다.
어떤 선생님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한때는 '친구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세대의 격차를 뛰어넘어 서로에게 어떤 말이든 편하게 할 수 있는 편안하고 막역한 사이. 그런 어른이 되면 정말 멋질 것 같았다. 권력으로 아이들을 누르지 않고 편견없이 그들과 동일한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어른.
그러나 여기에는 어마어마한 오류가 있다는 것을 해가 갈수록 절실히 깨달았다. 첫째, '어떤 말'이든 내게 해도 된다는 것은 천프로 허세+구라였다. '내가 들어도 기분나쁘지 않은 말' 혹은 '내가 너의 뾰족한 말도 들어줄 컨디션이 될 때의 어떤 말'이라는 조건이 붙어야 진실이었다.
생일잔치에서 음식 만들기를 할 때 햇반을 데워오지 않고 가져온 아이에게 전자렌지에 데워주겠다며 받아가는 순간 "제껀 2분 30초만 돌리세요"라는 말투에 요상하게 기분이 나빠지며 '따뜻한 밥 가져오라고 했는데 말도 안듣고 햇반 가져와놓고 요구사항도 많네' 싶어 괜한 반감 넣어 데운 햇반을 가자미 눈깔로 건네주게 된 날도 그랬다.
지금은 어떤 말도 가능한 시간이라며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라고 열어놓고는 너무 솔직하면 괜히 쏘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다 들어줄 것처럼 가능성은 열어놓고 결국 어른으로서의 반박불가 논리로 답정너처럼 방향을 끌어간 뒤 좋은 결론이었다며 못된 우월감에 찬 날도 그랬다.
둘째,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사이에 '친구'란 말도 안되는 거였다. 우린 나이차 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생 사이로 이미 너무도 명확한 위계가 있었고 내가 '친구'처럼 편하게 하라는 건 마치 상사가 직원에게 '편하게 해. 편하게'라는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거였으니까.
이런 멍멍소리적인 멋진 말에 로망을 갖는 대신 나는 우리의 위계적 한계를 인정하고, 어떤 식으로든 나의 만족을 위해 권력을 쓰지 않도록 자체 검열에 신경쓰는 일에 더욱 마음을 쏟기로 했다. 또한 '라떼는 마뤼야'가 되지 않게 먼저 나서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기다려주고, 아이들의 기준에서 일관되고 안정감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내 말을 권력으로 누르고 먹어버리는 어른이 되지 않는 것+믿고 기다려주는 어른이 되는 것도 어려워 죽겄는데 뭔 친구같은 선생님인가. 이 책은 그런 생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다니는 나를 다정하게 다독이고 일깨워줬다.
한때는 뾰족뾰족한 아이들을 보며 부모 탓도 많이 했다. 그러나 부모 탓만 해서는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부모가 그런 상태인 이상 아이는 계속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학교의 역할 역시 축소시키고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아이에겐 부정적인 딱지가 붙어가게 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주양육자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그들이 마주칠 또다른 어른들이 보여주는 세상도 그들에겐 새로운 가능성일 수 있다는 책임감을 깨달은 뒤로는 부모 탓만 할 수 없었다. 사회의 역할을 확대하고 성장시켜 모두가 어린이를 위해 마음을 쏟는 세상. 그 세상에서는 누구도 그들을 소홀히 여기지 못할 것이다. 그런 책임감만이 어린이라는 세계를 단단하게 지켜낼 수 있다고 작가님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는 건 50프로 이상은(혹은 더) 아이들이 빚어준 것이다. 그들은 늘 나의 현위치를 점검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지나온세계가 더 많은 것들을 섬세하고 품고 갈 수 있으려면 유경험자들이 할 일이 훨씬 많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