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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a Sage Nov 13. 2020

차가운 장미

영화에 등장하는 예술작품

<차가운 장미(Before the Winter Chill), 2013>

(스포주의)    

 

영화에서 의미 있는 하나의 상징으로 예술작품이 등장할 때가 있다. 이 영화의 미술감독인 사무엘 데쇼어스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작업을 맡기도 했다. 이 두 영화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예술작품으로 상징적 의미를 담아내는 작업을 좋아하는 것 아닌가 하는 성급한 추측을 해본다. 하나는 은근한 분위기로, 다른 경우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상징으로 작품을 등장시킨다. 이 영화는 후자에 속한다.     


<차가운 장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엘리트 남성이 순리대로만 살아온 인생에 허무함을 느끼고 혼외의 연애를 하게 되는 조금은 통속적인 내용의 영화이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도 어떻게 풀어내는가에 따라 달라지듯이 미장센의 서늘한 아름다움에 젖어들면서, 인생의 겨울에 접어드는 서사로 빠져들게 된다.     

신경외과의사 폴의 진료실에는 어느 날부터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장미꽃이 배달되기 시작한다. 폴은 그 무렵 자주 마주치며 묘한 인상을 남기던 의문의 여인 루가 꽃을 보냈다고 의심하고, 처음에는 불편해하고 냉대하지만 차츰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다.     


부쩍 가까워진 둘은 한 전시를 보면서 서로 내면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폴은 (전시 작품의 작가인) “빔 델보예(Wim Delvoye)를 알아요?”라고 묻는다.     

폴이 진료실에서 보던 의료용 이미지
폴과 루가 보던 Wim Delvoye의 작품

그들이 보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은 의사인 폴이 매일 들여다보던 의료용 사진과 같은 종류의 매체를 이용한 것이었다. 루가 작품을 보며 “당신과 닮았어요.”라고 말하자 폴은 이를 극구 부인하지만, 이 두 사진은 사람의 몸속을 그대로 들여다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루는 그가 몸 그대로를 보는 과학적인 시선 뿐 아니라 내면까지도 볼 줄 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 같다  


빔 델보예의 작품을 통해 폴이 속했던 차갑고 감정이 배어있지 않은 도구적 이미지의 세계에서 영혼이 드러나는 풍경으로 중첩되며 전환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안전하지만 무미건조한 폴의 인생이, 루를 만나며 복잡하고 다채로워지는 방향으로 바뀌는 전개와도 닮아 있다.


또한 이 작품이 보여주는 살벌하고 노골적인 장면들은 그들의 미래를 암시하기도 한다.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이면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멀리서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가까이 들여다보면 생경한 이미지들로 꽉 차 있다.


루와의 관계는 이 작품과 비슷했다. 멀리서 봤을 때 신비롭고 아름다웠던 그녀가 실제로는 추악한 것과 관련되었던 것처럼... 그녀는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폴에게 접근했고, 그들의 관계는 낭만적이고 영혼의 교감을 나누는 정도의 일탈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와 만나는 동안에도 폴은 의사로서의 역할은 놓지 않고 이어나갔다. 그가 맡은 환자가 수술을 받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모르드카이 말레크고, 어머니는 스타니아 말레크예요 폴란드 남부의 루블린 출신인데... 가족 모두 수용소에서 죽었어요. 가족 이야기는 처음이에요. 혹시 내가 죽어도 누군가 우리 가족을 기억해주길 바라서예요. 마지막으로 이름이라도 들려주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제거해야 할 종양은 가족인지도 몰라요.”     


영화의 후반부에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폴은 그 이름을 기억한다고 하면서 모르드 카이 말레크, 스타니아 말레크... 이렇게 환자가 잊고 싶지 않아 매달렸던 이름을 읊어준다.      


루와의 관계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폴은 전과 다름없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그녀의 흔적을 발견하고 주저앉는다. 폴은 루가 남긴 잔해를 바라보며, 거짓으로 시작되었던 그들의 관계에서 일말의 진심이라도 찾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루의 존재는 제거해야 할 종양으로 남은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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