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ge의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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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꿀자유 감염병 시리즈 2
프리온 : 살인단백질의 네 가지 얼굴
D.T. 맥스 지음 | 강병철 옮김
강병철 선생님이 보내주신 이 책을 읽은 지는 꽤 되었는데, 아시다시피 그동안 입시지옥과(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아이 코로나 + 나의 코로나 후유증 여파로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보내주실 때에 글쓴이가 (내가 현재 겪고 있는) 사르코-마리-투스와 비슷한 병을 앓고 있으며, 자기 병 때문에 단백질 병원체인 프리온에 관심을 가지고 취재를 시작했다고 말씀해주셨다. 리뷰를 써야 할 의무는 없지만 다 읽고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책에 대해 소개하고 싶어졌다.
우리가 감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러니까 병을 야기하는 병원체가 바이러스 같은 생물에 의해서라고 생각하지 단백질이 감염을 일으킨다는 개념은 좀 생소하지 않은가. 예전에 인간광우병으로 난리가 났을 때에 전 국민이 모두 프리온에 대해 공부를 한 것 같았지만, 난 여전히 감염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물에 의해서라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병이 (거칠게 말해) 단백질 질환이라고? 급 관심을 가지고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은 FFI, Fatal Familial Insomnia 치명적 가족성 불면증이란 병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한다. 이 병은 주로 중년에 발병을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동공이 바늘구멍만 하게 줄어들고, 변비, 여자는 폐경, 남자는 발기부전이 찾아오면서 잠을 자지 못하게 된다. 수개월간 잠을 자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면서 피로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걷거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되는데, 이 와중에도 정신이 말짱하다는 게 더 비참한 포인트... 이렇게 희귀하고도 끔찍한 병을, 이탈리아의 어떤 가문에서 최소 200년간 대물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중년에 발병하는 병의 존재 자체를 규명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FFI가 어떻게, 또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한 가문을 타고 내려왔던 것인지 병명을 알아내고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이 이 책의 주요 모티브처럼 다루어진다.
저자는 이 병을 시작으로 다른 병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단백질 병원체를 연구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느낌으로 기술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과학의 역사를 다루면서 급 인본주의적인 마무리를 하는 구성이...) 글쓴이, 이태리의 FFI 가문, 인간 광우병 환자들, 헌팅턴 병과 알츠하이머, 그리고 사르코-마리-투스병의 공통분모는 단백질의 구조 이상에서 비롯된다는 거. 저자도 나도 21번 염색체의 돌연변이로 아프다는 거. 아직은 과학과 의학의 해결방법은 없고 여기까지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연구를 하고 있다. 최소한 명명이라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기적 같지 않은가...
비슷한 병과 상태를 겪고 있으면 생각도 비슷하게 할 수 없나 보다. 저자가 자신이 다른 프리온 질환에 걸린 사람보다 운이 좋다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내 병 또한 치명적이지 않고 만성적이다. 만성적이라는 걸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면 내게 적응할 시간이 있다는 것이겠지.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