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칼이 될 때]
“Girls can do anything” 이란 문구가 인터넷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한 여성 아이돌이 이 문구가 쓰여진 핸드폰 케이스를 들고 있는 사진을 SNS에 올렸는데, 그걸 두고 ‘메갈’이라며 비난이 이어진 것이다. 나는 처음에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Girls can do anything”이라니! 얼마나 멋진 말이야! 나는 그 아이돌과 똑같은 핸드폰 케이스를 주문했다.
“Girls can do anything”이 쓰여진 핸드폰을 들고 다니면서부터 내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내 핸드폰을 쳐다보면 ‘혹시 나를 메갈로 낙인찍는 거 아닐까? 일베가 갑자기 시비라도 걸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서 그 문구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괜히 생각이 깊어져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결정적으로 학교에 갈 일이 생겼을 때가 문제가 되었다. 중고등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할 일이 생겼는데, 학생들과 교사들이 이것에 대해 문제 삼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외부강사로써 학교에 갈 때,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다는 것에 대해 문제 삼는 경우가 있었고, 불필요한 논란을 줄이기 위해 잠깐 리본을 떼기로 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걸로 오만가지 상상을 하면서 노심초사하는 내 모습이 좀 싫어졌다. 그래서 결국 핸드폰 케이스를 바꿔버렸다.
나는 스스로 메갈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페미니즘에는 동의하는 면이 많다. 그런데 이런 말을 집 밖에 나가서는 잘할 수가 없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나옴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격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 거부감은 남녀노소를 불문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그런 주제를 꺼내는 것을 피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불합리한 면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그에 대해 명쾌하게 반박할 만큼 논리적으로 정리된 말이 나에겐 없었다.
2016년에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졌을 때, 수많은 여성들이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며 집단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사건을 두고 여성 혐오범죄로 규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으나, 당시 경찰청장은 “이건 여성 혐오범죄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한국에는 증오범죄법이 없고, 혐오범죄에 대한 판정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성 혐오범죄를 명확하게 증명해낼 수는 없었을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는 “여자들에게 항상 무시당해서 범행했다”라고 진술했으며, 수많은 여성들은 나도 이런 위험 속에 살고 있다는 것에 공감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뉴스에만 나오는 일이 아니라 수많은 여성들이 그동안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으며, 앞으로 생길까 봐 걱정하고 있다. 여성으로서 일상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뒤에 걸어오는 선량한 남성을 치한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 쫒아와 칼을 들이미는 경우도 있다. 내 주변 여성들 몇 명만 모여 이야기를 해봐도 경미한 성희롱과 성추행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다. 심각하고 위험한 상황을 겪은 경우도 꽤 많다. 그런 현실인데도 여성들이 몸으로 느끼는 공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것 자체를 비하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다.
혐오발언은 내가 경험한 것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바로 구분이 된다. 그런데 나와 같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때 구분하는 것이 참 어렵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도 내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혐오표현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홍성수는 “말이 칼이 될 때”에서, ‘혐오는 그냥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를 뜻한다’고 정의했다. 혐오표현은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번역한 말이다. 혐오표현이 위험한 이유는 ‘혐오표현 자체가 소수자에게 정신적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차별로 직결되는 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표현이 곧 차별의 사회 현실을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혐오표현의 해악은 혐오표현에 노출된 소수자 개인 또는 집단이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누구나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공존의 조건’을 파괴하며, 혐오표현 자체로 차별이고, 실제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성 혐오발언에 대해 미러링으로 대응하는 메갈리아에 대해서 남혐도 문제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홍성수는 이에 대해서 소수자 혐오의 경우처럼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소수자들이 차별받아온 ‘과거’와 차별받고 있는 ‘현재’와 차별받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라는 맥락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 남성에 대한 혐오발언과 여성, 장애인에 대한 혐오발언이 같다고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에 여성들이 감정적인 공포로 반응한 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차별이 실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민주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표현’이 존중받아야 하고, 풍부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말이 아닌 칼이 되는 표현과 대화는 우리를 죽게 한다. 내가 하는 말이 말인지 칼인지 구분하려면 내가 어떤 맥락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나의 맥락을 넘어 타인의 맥락을 살피는 수고는, 누구나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 수 있다는 공존의 조건을 형성하게 해 줄 것이고, 그것은 타인의 안전만이 아닌, 나의 안전도 지켜 줄 것이다.
저자는 혐오표현을 규제할 장치를 마련하는 것뿐만 아니라, 혐오표현을 격퇴시킬 표현의 자유를 지원하는 방향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더 적은 표현이 아니라 더 많은 표현이 최고의 복수”이니, 혐오 세력을 고립시키고 퇴출시킬 수 있도록 함께 싸우는 것을 통해 시민사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는 혐오표현에 대해 잘 정리한 교과서 같다. 이 책을 읽고 혐오표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여혐과 남혐에 대한 아리송함이 해소되었다. 혐오표현과 차별, 인권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를 원한다면 일독을 권한다.
"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