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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인 척한 고냥이 Nov 04. 2021

부르고뉴: (3) 샤블리

(Chablis)


샤블리는 드라이 화이트 와인에 특화된 생산지다. 서늘한 준 대륙성 기후와 석회질 점토(limestone clay) 토양에서 오직 샤르도네(Chardonnay) 품종만으로 영롱한 미네랄과 은은한 꽃과 과일 풍미, 파삭한 신맛을 내는 개성적인 와인을 만든다. 샤블리 와인에서는 기본적으로 부싯돌 같은 독특한 풍미가 드러나며, 최상급 와인의 경우 은근한 꿀 뉘앙스가 더해져 가녀리면서도 관능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마치 발레리나, 발레리노 같은 인상이랄까. 샤블리는 그 개성과 품질에 걸맞은 명성을 누려왔다. 얼마나 인기가 높았는지 원산지 명칭 보호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절엔 미국이나 호주에서 만든 화이트 와인에도 샤블리라는 명칭이 무분별하게 사용됐을 정도다. 심지어 샤르도네로 만든 와인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샤블리가 화이트 와인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최근 샤블리는 예전만큼 명성을 누리는 것 같지는 않다. 우선 같은 부르고뉴 내에서도 꼬뜨 드 본(Côte de Beaune)의 넉넉하고 우아한 화이트 와인들에게 밀리고 있는 실정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품질의 샤르도네들이 많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샤블리의 독특한 스타일이 오히려 초심자에게는 까다롭고 다가가기 어려운 와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 같다. 다른 지역에서 만든 샤르도네 와인보다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르도네 품종의 세계적인 인기가 사그라들지 않는 가운데, 대체할 수 없는 샤블리의 맛과 철저히 유지되는 품질은 장기적 관점에서 확실한 경쟁력이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다른 부르고뉴 와인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가격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사 두는 게 가장 저렴하게 샤블리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위치와 토양, 그리고 기후

샤블리는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160km 정도 떨어져 있다. 원래 샤블리가 포함된 욘(Yonne) 지역은 화이트 와인보다 레드 와인을 많이 생산하던 지역이었다. 생산된 와인들을 욘 강을 이용해 파리로 쉽게 운송할 수 있었기 때문에 특히 인기가 높았다. 19세기 말에는 전체 포도밭 면적이 4만 ha에 달했을 정도였다. 와인을 물처럼 마시던 시대 욘 지역의 와인들은 파리의 식수 역할을 담당했던 셈이다. 그러나 필록세라가 창궐하며 욘 지역에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 전국을 연결해 건설되던 철도가 욘 지역을 비켜가는 바람에 또다시 된서리를 맞았다. 파리의 식탁은 프랑스 남부를 비롯해 프랑스 각지에서 값싼 철도로 운반된 와인들이 점령하게 되었고, 욘의 농부들 대다수는 포도 재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를 포기하지 않은 일부 생산자들은 다른 길을 모색한다. 편하게 마시는 와인 대신 고품질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지역에 집중한 것인데, 그 결과 샤블리 마을 주변의 언덕을 중심으로 섬세하고 순수한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밭이 섬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 샤블리 포도밭 지도(출처: chablis-wines.com) ]

현재 샤블리의 포도밭은 20개 정도의 작은 마을에 걸쳐 있다. 전체 포도밭 넓이는 2020년 기준 5,700 ha인데, 이는 19세기 후반 필록세라로 인한 황폐화와 두 차례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550 ha까지 줄어들었던 1955년과 비교하면 1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샤블리의 포도밭 조성 가능 면적은 스렌(Serein) 강 좌우로 6,800 ha에 이르기 때문에 아직 확장의 여지는 남아 있다. 하지만 지나친 확장을 경계하는 이유는 토양 때문이다. 1억 5천만 년 전 쥐라기에는 얕은 바다였던 샤블리의 토양에는 굴 껍데기나 조개껍질 등의 화석이 많이 발견된다. 샤블리의 그랑 크뤼(Grand Cru)와 프르미에 크뤼(Premier Cru)를 포함해 초기에 조성된 포도밭은 석회질 이회토 중심의 키메리지안 토양(Kimmerigian soil)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는 중성적인 풍미와 미네랄 특성을 드러내는 핵심 요인으로 여겨졌다. 반면 조금 더 어린 포틀랜디안 토양(Portlandian soil)은 구성 성분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낮은 품질의 와인이 나온다고 평가된다. 물론 토양 이외에도 경사도와 일조량, 미세기후 등 다양한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샤블리는 샹파뉴 지역과 유사한 준 대륙성 기후를 보여 여름에는 매우 덥고 겨울에는 혹독하리만큼 춥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5월까지도 지속되는 서리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커다란 양초를 몇 백개씩 켜거나, 스프링클러를 사용해 새싹들을 얼린다. 기온이 빙점 이하로 떨어질 때 스프링클러로 물을 뿌려 주면 새싹 주변을 둘러싼 물이 얼면서 이글루처럼 새싹을 보호하는 원리다. 양초로 뒤덮인 새벽 포도밭 풍경이나 와이어를 따라 줄줄이 늘어선 포도 줄기들에 얼음이 매달린 모습이 장관을 연출하지만, 그 모습에 감탄하기에는 서리로 인한 피해가 너무 크다. 이미 샤블리는 2016년, 2017년에 이어 2019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올해 4월에 불어닥친 서리는 재앙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샤블리를 대표하는 생산자 장-마크 브로카르(Jean-Marc Brocard)와 윌리암 페브르(William Fevre)는 입을 모아 돋아난 새싹의 80% 이상이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피해를 얼마나 최소화할 수 있을지, 서리 이후로 돋아날 새싹이 얼마나 될지에 따라 올해 작황 수준이 결정되겠지만, 궤멸적 피해가 발생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등급 체계

샤블리 와인은 샤블리 그랑 크뤼, 샤블리 프르미에 크뤼, 샤블리, 쁘띠 샤블리 등 4개 등급으로 나뉜다. 샤블리만큼 등급에 따른 품질이 명확히 드러나는 지역도 드물다. 거의 예외 없이 그랑 크뤼는 프르미에 크뤼보다, 프르미에 크뤼는 일반 샤블리보다 뛰어나다. 쁘띠 샤블리 역시 일반적으로 샤블리보다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는데, 둘 간의 차이는 품질보다는 즉각적인 음용성과 스타일의 문제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어쨌거나 이렇게 등급 별 차이가 확실한 이유는 풍부한 일조량의 경사면과 양질의 토양에는 어김없이 그랑 크뤼와 프르미에 크뤼 포도밭들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 샤블리의 4개 등급과 생산량 점유율(출처: chablis-wines.com) ]

샤블리 그랑 크뤼(Chablis Grand Cru)는 샤블리 마을 앞을 지나는 스렌 강 우안 남향의 가파른 경사지에 위치한다. 2020년 기준 면적은 102ha로 샤블리 전체 포도밭의 1.7% 수준. 블랑쇼(Blanchot), 부그로(Bougros), 레 끌로(Les Clos), 그르누이으(Grenouilles), 레 프뢰즈(Les Preuses), 발뮈르(Valmur), 보데지르(Vaudésir) 등 7개 포도밭으로 구성되는데, AOC 명칭은 '샤블리 그랑 크뤼' 하나만 존재한다. 꼬뜨 도르의 그랑 크뤼처럼 개별 포도밭 이름을 그대로 AOC 명칭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하지만 포도밭 별 개성은 또렷하다. 26ha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레 끌로는 입지 조건이 뛰어나 품질 면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 화사한 향이 매력적이며 숙성 잠재력도 뛰어나 장기 숙성하면 소테른(Sauternes)처럼 밀도 높은 향기가 드러난다. 그르누이으는 '개구리'라는 뜻인데 스렌 강에 면한 밭의 아랫부분에 개구리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전반적으로 꽃과 과일 아로마가 좋은 와인이 생산되며, 밭의 윗부분에 생산된 와인은 미네랄 뉘앙스가 특히 뛰어나다. 그르누이으와 레 끌로 사이 움푹 들어간 계곡에 위치한 발뮈르는 품질 면에서 레 끌로 못지않다. 풍성한 질감과 화사한 아로마를 겸비하고 있어 가장 이상적인 샤블리로 꼽는 경우가 많다. 보데지르는 발뮈르와 입지 조건의 특징이 유사한데, 발뮈르보다 좀 더 스파이시하며 섬세한 캐릭터를 드러낸다. 레 프뢰즈는 그랑 크뤼 포도밭 중 가장 햇볕을 잘 받는 곳에 위치하며 배수도 잘 되는 편이다. 따라서 농밀하며 둥근 인상의 와인이 생산되는데, 미네랄 뉘앙스는 다소 적은 편이다. 반면 동향 경사면에 위치한 블랑쇼는 햇볕이 빨리 사라지기 때문에 섬세한 미네랄 뉘앙스가 잘 살아있고 은은한 아로마가 매력적인 와인을 생산한다. 북쪽 끝에 있는 그랑 크뤼 중 막내 격인 부그로는 고도가 낮고 완만해 입지 조건이 가장 떨어진다. 표현력이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샤블리지엔(Chablisienne)이나 윌리암 페브르 같은 빼어난 생산자들이 단점을 보완해 훌륭한 와인을 만들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샤블리에는 깍두기 그랑 크뤼도 있다. 라 무똔느(La Moutonne)가 그 주인공인데, 보데지르와 레 프뢰즈 사이에 위치한 2.5 ha 규모의 작은 포도밭이다. 부르고뉴 와인 협회(BIVB)에서는 라 무똔느를 그랑 크뤼로 인정하는 반면, 프랑스 국립 원산지 명칭 통제 연구소(INAO)에서는 위 7개 그랑 크뤼만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도멘 롱-드빠뀌(Domaine Long-Depaqui)에서 출시하는 라 무똔느의 레이블에는 샤블리 그랑 크뤼라는 표현이 명확히 적혀 있으며, 그에 상응하는 품질 또한 갖추고 있다. 


[ 샤블리 그랑 크뤼 레 끌로 포도밭 전경 ]

샤블리 프르미에 크뤼(Chablis 1er Cru)에 속하는 40개의 포도밭은 샤블리 전역에 다양하게 퍼져 있다. 2020년 기준 면적은 778ha로 샤블리 전체 포도밭의 13.5%를 점유한다. 경사도와 방향이 다양하지만 토양의 질을 포함한 전반적인 입지가 일반 샤블리에 비해 뛰어난 것은 확실하다. 스렌 강을 기준으로 그랑 크뤼가 위치한 우안에 16개, 좌안에 24개의 프르미에 크뤼가 있다. 특히 푸르숌(Fourchaume)과 몬테 드 토네르(Montee de Tonnerre), 몽 드 밀리외(Mont de Millieu) 같이 그랑 크뤼 인근에 위치한 프르미에 크뤼들의 품질이 상당히 뛰어나다. 좌안에서는 몽멩(Montmains), 바이용(Vaillons) 등이 유명하다. 그런데 샤블리 프르미에 크뤼에는 독특한 규정이 있다. 모든 프르미에 크뤼는 자신의 이름을 레이블에 표시할 수 있지만, 규모가 작거나 인지도가 낮은 포도밭은 인근의 유명 프르미에 크뤼의 이름을 대신 사용해도 무방하다. 예를 들면 푸르숌 인근의 프르미에 크뤼 보퓔렁(Vaupulent)의 경우, 레이블에 보퓔렁 대신 푸르숌이라고 표기할 수 있는 것이다. 아래 표를 보면 포도밭 별로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 샤블리 프르미에 크뤼 포도밭 목록 (출처: chablis-wines.com) ]

일반 샤블리(Chablis) 포도밭 면적은 2020년 기준 3,702ha로 전체 샤블리 식재 면적의 64.1%에 이른다. 샤블리의 근간을 이루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카테고리로, 고전적인 푸드 페어링 조언을 따라 생굴과 곁들이기 좋다. 쁘띠 샤블리(Petit Chablis)의 식재 면적은 1,189 ha로 주로 경사면의 상단이나 고원지대의 초입에 위치한다. 단단한 갈색 석회석이나 토사질(silty)이 섞인 모래 토양에서 섬세함은 조금 부족하지만 과실 풍미가 잘 드러나며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와인을 생산한다.


샤블리는 생산자에 따라 양조 스타일이 나뉜다. 포도의 섬세한 풍미와 미네랄리티를 중시하는 생산자는 발효 및 숙성에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를 사용하지만, 복합미를 추구하는 생산자는 오크를 사용해 미묘한 뉘앙스를 더한다. 오크통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주로 프르미에 크뤼와 그랑 크뤼에 사용하며, 오크 풍미가 지나치게 발현되어 테루아와 과일의 풍미를 가리지 않도록 새 오크의 비율을 낮추고 오크통 내부를 약하게 그을린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와 오크통 사용 사이에서 절충적인 자세를 취하는 생산자도 있다. 이는 단지 각자의 개성일 뿐이며, 모든 스타일은 경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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