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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인 척한 고냥이 Nov 16. 2021

부르고뉴 : (5) 보졸레

(Beaujolais)

'보졸레가 부르고뉴였어?’ 라며 깜짝 놀라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사용하는 품종도, 와인 스타일도 부르고뉴(Bourgogne) 주류 스타일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피노 누아(Pinot Noir)와 샤르도네(Chardonnay) 품종으로 월드 클래스 레드와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는 다른 부르고뉴 지역과 달리, 보졸레는 화이트 와인을 거의 생산하지 않으며 가메(Gamay) 품종을 사용해 주로 과일 풍미가 도드라지는 친근한 레드 와인을 만들 뿐이다. 이렇다 보니 부르고뉴를 논할 때 보졸레는 아예 제외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르고뉴와인협회(BIVB)의 공식 홈페이지에도 보졸레에 대한 소개는 빠져 있다. 대신 보졸레 와인협회(Inter Beaujolais)에서 운영하는 별도 홈페이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행정구역 상 보졸레는 엄연히 부르고뉴에 속한다. 주요 와인 서적들도 간략하게나마 보졸레를 부르고뉴 지역 중 하나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어찌 보면 슈퍼 스타급 미남미녀 배우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 있는 개그맨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최근의 보졸레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지역이다. 그저 그런 개그맨이었던 유재석이 지금은 국민 MC가 되었듯, 보졸레 또한 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와인으로 변화하고 있다. 



보졸레 누보를 넘어 보졸레 크뤼로, 내추럴 와인으로

보졸레는 와인업계의 빼빼로다. 연간 판매량의 절반 이상이 빼빼로데이 전후에 팔려나간다는 빼빼로처럼,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 출시일을 중심으로 반짝 입소문을 탔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다. 마케팅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보졸레 누보는 보졸레 와인에 그 성공만큼이나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일반적인 인식상 보졸레와 보졸레 누보는 동일한 것이 되었기에, 보졸레 누보 출시일이 지나면 보졸레에 대한 관심은 눈 녹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결국 2000년대 초반 보졸레 누보의 전 세계적 인기가 사그라들자, 보졸레 누보의 비중을 늘려 왔던 보졸레 생산자들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 보졸레 누보 홍보 이미지 (출처: www.beaujolaisnouveau.fr) ]

하지만 보졸레에는 보졸레 누보만 있는 게 아니다. 소위 10 크뤼(10 Crus)라고 불리는 북쪽의 10개 크뤼와 그를 둘러싼 39개 마을을 중심으로 몇 년 이상의 숙성 잠재력을 갖춘 고품질 와인이 생산된다. 특히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내추럴 와인의 중심에 보졸레가 있다. 내추럴 와인의 그루로 불리는 쥘 쇼베(Jules Chauvet)의 근거지가 보졸레였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마르셀 라피에르(Marcel Lapierre), 이봉 메트라(Yvon Metras), 장 푸아야르(Jean Foillard), 얀 베르트랑(Yann Bertrand) 등은 현재 내추럴 와인의 명장으로 불리며 애호가들 사이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들은 모르공(Morgon), 플뢰리(Fleurie) 등의 크뤼들을 중심으로 테루아의 특징과 가메 품종의 개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와인을 만든다. 얼마나 인기가 높은지 일부 와인들은 이미 꼬뜨 도르(Côte d’Or)의 프르미에 크뤼(1er Cru) 급 의 평가와 가격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다. 이제 보졸레 하면 누보만을 떠올리던 시대는 지나고 있다. 



생산지역 및 토양

보졸레 생산 지역은 마꼬네(Macônnais) 남쪽에 넓게 펼쳐져 있다. 남북으로 55km, 동서로 15km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96개 마을을 아우르며 재배면적은 1.9만 ha나 된다. 북쪽 일부는 마코네와 생산지역이 겹치며, 행정구역상으로도 마코네에 속한다. 와인 생산량은 약 1백만 hl 정도인데, 일부 빈티지의 경우 꼬뜨 도르와 꼬뜨 샬로네즈(Côte Chalonnaise), 마꼬네의 생산량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을 때도 있다.


[ 보졸레 지도 (출처: winefolly.com) ]

보졸레의 토양은 보졸레 중부에 위치한 빌프랑슈-쉬르-사온(Villefranche-sur-Saône)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극명하게 나뉜다. 남부의 경우 주로 차가운 점토질 토양으로 구성돼 있어 배수가 좋지 않으며 포도가 완숙되기 어렵다. 때문에 숙성 없이 빠르게 소비하는 가볍고 경쾌한 일반 보졸레 와인을 생산한다. 대부분의 보졸레 누보를 생산하는 지역도 남부다. 역시 남부에서 주로 생산하는 보졸레 쉬페리외(Beaujolais Supérieur)도 최대 수확량이 조금 적고 최저 알코올 함량이 살짝 높을 뿐 품질이나 스타일의 차이는 거의 없다. 반면 북쪽은 10 크뤼와 보졸레 빌라주(Beaujolais-Villages)를 생산하는 지역으로 화강암 기반에 모래, 편암, 석회암 등 다양한 표토들이 덮여 있다. 전반적으로 배수가 좋고 보온성 또한 뛰어나 가메 품종이 매우 잘 자라기 때문에 농축적인 과일 풍미와 복합적인 뉘앙스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 특히 10개 크뤼는 토양 및 지형 등의 차이에 따른 개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생산자들 또한 떼루아의 개성을 최대한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그런 노력의 일부는 내추럴 와인 생산으로 이어졌다. 이미 모르공, 플레리, 물랭 아 방(Moulin-à-Vent) 등 주요 크뤼들은 내추럴 와인 애호가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지역이 되었다. 꼭 내추럴 와인이 아니더라도 보졸레 10 크뤼는 반드시 기억하고 경험해 볼 만하다. 보졸레 크뤼는 레이블에 보졸레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마을 명칭만을 표기한다. 


생-따무르(Saint-Amour)

보졸레 크뤼 중 제일 북단에 위치한 생-따무르는 마꼬네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생-따무르라는 이름은 로마 군대를 탈출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후 이 지역에 수도원을 설립해 훗날 성인으로 추대된 아마테르(Saint Amateur)의 이름에서 따왔다. 생산되는 와인은 대체로 가볍고 부드러워 2~3년 내에 소비하는 것이 좋다. 


쥘리에나(Juliénas)

생-따무르 남동쪽에 어슷하게 인접해 있는 쥘리에나는 보졸레 지역에서 최초로 포도 재배가 시작된 곳으로, 그 이름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산기슭 급경사지에 포도밭이 있어 생산되는 와인의 평균적인 품질이 높은 편임에도 다른 마을에 비해 평가가 높지 않다. 초기에는 과일 풍미가 도드라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파이시한 향과 부드럽고 풍만한 질감이 발현된다. 때문에 잘 만든 와인의 경우 5년 이상 숙성해 즐기는 것이 좋다. 


쉐나(Chénas)

쉐나는 10 크뤼 중 포도밭 규모가 가장 작다. 쉐나는 오크(oak)를 의미하는데, 해당 지역에 오크 나무가 많이 자라기 때문이다. 쉐나의 포도밭은 상 중턱에 흩어져 있는데 생산되는 와인은 풀 바디에 향긋한 꽃 향기와 넉넉한 풍미를 지녔다. 대부분의 와인은 5년 안에 소비되지만, 잘 만든 와인은 10년 이상의 숙성 잠재력을 지닌다.


물랭-아-방(Moulin-à-Vent)

물랭 아 방은 10 크뤼 중 가장 힘이 있으며 긴 숙성 잠재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풍미가 농축적이고 타닌 또한 많아 10년 이상 숙성하면 잘 만든 부르고뉴 피노 누아, 혹은 북부 론(Northern Rhône)의 와인과 유사한 풍미를 드러낸다. 이는 물랭-아-방의 토양이 철분과 망간 함량이 높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유명 생산자들이 많이 몰려 있으며 ‘보졸레의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크뤼의 이름은 지역 안에 있는 풍차(moulin)에서 따왔다. 


플레리(Fleurie)

플레리는 그 이름처럼 꽃다발 같은 와인이다. 화사한 꽃 향기가 매력적이며 신선하고 섬세한 스타일로 질감 또한 부드럽다. 하지만 풍미의 밀도가 높고 실키한 타닌과 탄탄한 구조를 지녀 숙성 잠재력 또한 우수하다. 바로 마셔도 즐겁지만 10년 이상 숙성하면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눈에 보이면 놓치지 말아야 할 와인이다.


쉬루블(Chiroubles)

플뢰리 서편에 인접한 작은 크뤼로 그림 같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하다. 10 크뤼 중 해발 고도가 가장 높아 신선한 신맛과 향수 같이 향긋한 아로마를 지닌 와인을 생산한다. 바디는 가볍고 타닌 또한 부드러워 2~3년 내에 대부분 소비한다. 


모르공(Morgon)

10 크뤼 중 두 번째로 큰 크뤼로 토양과 와인 모두 다른 크뤼들과 차별적이다. 특히 모르공 중앙의 꼬뜨 뒤 피(Côte du Py) 구획은 망간이 풍부한 편암 경사면에 위치해 가장 힘차고 숙성 잠재력이 빼어난 와인을 생산한다. 빈티지로부터 2-3년 정도 지나면 피노 누아와 비슷한 면모를 드러내며, 농축적인 과실 풍미와 감칠맛은 10년 이상의 숙성기간 동안 아름답게 변화한다. 특히 빼어난 내추럴 와인이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내추럴 와인 애호가라면 주목해야 할 크뤼다. 


레니에(Régnié)

모르공 남서쪽에 어슷하게 인접해 있는 레니에는 1988년 크뤼로 승격됐다. 이 지역 사람들은 로마인들이 레니에에 보졸레 최초의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믿는다. 레니에의 토양에는 모래가 많이 섞여 있으며, 가볍고 향이 좋으며 생동감이 탁월한 와인을 생산한다. 와인은 숙성이 빨리 되는 편으로 대부분 2~3년 안에 소비된다.


브루이(Brouilly)

10 크뤼 중 가장 남쪽에 있는 크뤼로 면적이 가장 넓다. 대부분 화강암 토양으로 적당한 타닌과 산미를 지닌, 과실 향이 풍부하며 둥근 질감에 토양 뉘앙스가 살짝 스치는 와인을 만든다. 생산량이 많기 때문에 품질이 균일하지 않은 편이며, 대부분 3~4년 안에 소비된다. 브루이라는 이름은 2천 년 전 이 지역에 포도나무를 심은 로마인 브루일리우스(Bruilius)에서 유래했다.


꼬뜨 드 브루이(Côte de Brouilly)

브루이 크뤼에 둘러싸인 꼬뜨 드 브루이는 사화산인 브루이산 동남쪽 경사지에서 위치한다. 일조량이 충분해 완숙한 포도를 얻을 수 있으며, 수확 시기 또한 보졸레 크뤼 중 가장 빠른 편이다. 진흙과 자갈이 조금 섞인 섬록암(diorite) 중심의 토양은 배수가 잘 되며, 브루이보다 강건하고 과일 풍미가 뛰어난 와인을 만든다. 



품종 및 스타일, 양조 방법

보졸레에서는 레드, 로제, 화이트 와인을 모두 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재배 품종의 98% 이상이 레드 품종인 가메이며, 생산량 또한 레드 와인이 압도적이다. 10 크뤼의 경우, 화이트와 로제 와인은 만들 수 없다. 거의 샤르도네로 양조하는 화이트 와인 생산량은 1% 수준에 불과하다. 그나마 적은 화이트 와인 재배지가 대부분 마코네와 겹치는 북부에 밀집돼 있는데, 소비자의 인지도 및 선호도가 비교적 높은 마콩 블랑(Macôn Blanc) 레이블을 달고 출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알리고테(Aligote) 품종은 2004년 이후 추가 식재가 금지되었으며, 사용 또한 2024년까지만 한시적으로 허용된다. 보졸레 로제는 가메 품종으로 만들 수 있는데 상상 속 동물과 유사하다. 현지에서조차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졸레 레드 와인은 규정 상 15%까지 화이트 품종을 블렌딩 할 수 있으나 대부분 가메만 사용한다. 가메의 공식 명칭은 가메 누아 아 쥐 블랑(Gamay Noir à Jus Blanc)으로, 하얀 과즙의 검은 가메라는 뜻이다. 이런 품종의 특성 때문인지 보졸레에서는 오래전부터 탄산 침용(Macération carbonique) 방식을 사용해 와인을 양조해 왔다. 탱크에 압착하지 않은 포도송이를 통째로 넣고 밀폐한 후 이산화탄소를 가득 채우면 으깨지 않은 포도알 안에서 세포 내 발효(fermentation intracellulare)라는 독특한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 결과 적은 양의 알코올과 함께 특유의 꽃 향기와 바나나 향을 내는 풍미 성분이 생성된다. 사과산은 감소하며 껍질의 타닌은 적게 색소는 많이 추출되어 신맛과 떫은맛은 적고 진한 붉은빛이 감도는 프루티한 와인이 된다. 이후 포도의 무게 때문에 자연스럽게 으깨진 아래쪽부터 일반적인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기 시작하며, 4~6일 정도 지난 후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포도를 압착해 본격적으로 알코올 발효를 진행한다. 


탄산 침용은 흔히 보졸레 누보를 만드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지만, 누보 이외의 일반적인 보졸레 와인을 만드는 데도 사용돼 왔다. 가메 품종의 가볍고 신선한 과일 맛을 이끌어내는 데 매우 적절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부르고뉴의 다른 지역에서 피노 누아를 양조하는 방법과 같은 일반적인 양조 방법을 적용해 중장기 숙성이 가능한 고품질 보졸레 와인을 만들려는 시도 또한 늘고 있다. 14세기 말 용담공 필립(Philippe-Le-Hardi)에 의해 부르고뉴에서 퇴출되는 고난을 겪었던 가메 품종은 이제 보졸레라는 둥지에 자리를 잡고 미운 오리 새끼에서 우아한 백조로 탈바꿈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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