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alking Dadd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초 Joe Cho Jan 28. 2024

이 정도면 북한군도 못 와

2023년 3월 파평산 백패킹

두 번째 백패킹의 박지는 경기도 파주의 파평산이었다. 파평산은 496m로 그리 높진 않지만, 만만치 않다. 깔딱고개가 세 곳이 있어 마음속 깊이 묵혀 두었던 온갖 나쁜 마음과 욕이 세 번 분출되는 산이다. 게다가 백패킹을 하기 위해 20㎏이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간다면, 마주하게 되는 육체적 한계는 더욱 선명해진다. 앞서갔던 선자령은 ‘령(嶺)’이고, 파평산은 ‘산’이다.


그래서 아무도 안 오나 보다. 다음 날 하산하려고 텐트를 접을 때 등산객 두 명이 올라온 게 전부였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해가 떠 있는 동안 쉬지 않고 사격 연습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아침엔 전차의 무한궤도 굴러가는 소리도 들렸다. 산 곳곳엔 벙커 등 군사 시설이 보였다. 실제 파평산은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제1호 6·25 전사자 유해 발굴 기념 지역이기도 하다. 개성공단이랑 27㎞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2020년 6월 개성 남북공동 연락사무소가 폭파됐을 때의 모습도 날씨가 좋았을 때 이곳에서 육안으로 확인했다.


정상에 올라왔을 때 드는 생각은, ‘이 정도면 북한군도 못 와.’ 그래도 오길 잘했다. 정상에 올라올 때마다 자연스럽게 루틴처럼 치고 올라오는 생각이다. 정상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산은 반드시 올라온 만큼 보답하니까.


우리는 정상 표지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누가 봐도 텐트 치기 좋은 평평한 곳으로 내려왔다. 파주 일대와 저 멀리 북녘땅까지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날이 어둑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짙은 구름이 선루프 블레이드처럼 머리 위를 지나갔다. 새들도 저녁 점호를 하느라 빽빽대며 분주했다. 그래도 선자령에서 한번 해봤다고 텐트 피칭 속도가 빨라졌다.


날이 저물고 우리도 각자 챙겨온 식량을 꺼냈다. 나는 이번에 스페셜 메뉴로 닭강정을 준비했다. 지난 선자령 백패킹 때 가져간 육회와 육사시미처럼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형님들의 기대치가 점점 올라가 큰일이다. 형님들도 닭강정에 질세라 주섬주섬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진도 홍주와 푸아그라, 동해에서 직접 공수해 얼려 두었던 멍게, 히말라야에서 온 숙취 해소제 등이 등장했다. 아침에는 커피콩을 갈아 바로 내려 마시는 호사도 누렸다.


아무도 오가지 않는 산자락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우리는 잠시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밤새 도란도란 두런두런 뭐 그리 할 이야기가 많았는지. 자연과 자유가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을 보내며 2023년의 봄을 맞이했다. 다들 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모두 멋지게 해치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겨울의 끝을 잡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