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초 Joe Cho Feb 17. 2024

흐린 기억 속의 비에이

2018년 1월 홋카이도 로드트립 ep.5

신치토세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이미지는 비에이(美瑛, Biei)에 광활하게 펼쳐진 설원이었다. 삿포로라는 도시도, 미스터 초밥왕의 스시도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시간과 정신의 방처럼 무한히 하얀 미지의 언덕이 나를 북쪽으로 잡아당겼다.


요이치의 닛카 위스키 증류소에서 나와 비에이로 차를 몰았다. 드디어 고대했던 풍경을 곧 볼 수 있으리라는 설렘이 커지면서 눈발도 거세졌다. 폭설이었다. 와이퍼의 속도가 스트린젠도에 맞춰 나부끼기 시작했다. 다행히 삿포로에서 비에이까지 가는 길은 대부분 고속도로라 주행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아사히카와시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비에이역으로 향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은 어딜 가나 지키는 철칙이다. 근처에 새우튀김과 카레가 맛있다는 식당에 들렀다. 비에이를 찾는 이들의 필수 코스 중 하나로 보였다. 새우튀김은 신선했고, 히레카츠는 두툼했다. 카레 또한 밥도둑이었다. 가게 앞에 간판처럼 쓰이는 폭스바겐 1세대 비틀은 거의 눈에 파묻혀 있었다. 비에이는 홋카이도에서도 눈이 가장 많이 쌓이는 곳이다. 지대가 높아 기온이 낮아서다. 지난 2023년 기준 아사히카와시(市)와 비에이초(町)의 적설량은 6~7m에 달했다.


배를 맛있게 채우고 나오니 하늘이 잔뜩 심통 났다. 날씨가 좋았으면 더 좋았을걸. 아쉬움이 많이 들었지만, 그 채로 패치워크 로드로 달려갔다. 이때의 하늘은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남중고도가 가장 높은 시각이었지만, 조도는 거의 저녁에 가까웠다. 눈이 다시 쏟아졌고 가시거리도 점점 짧아졌다. 그래도 마침내 그곳에 당도했다. 우중충한 분위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사람들은 많이 없었다. 기대를 너무 했던 탓일지 아니면 날씨 탓이었을까? 좌우지간 무언가를 탓하고 싶은 그런 광경이었다.


237번 국도와 452번 국도 사이의 구릉지대인 이곳은 형형색색의 밭이 펼쳐져 있다. 그 사이로 난 작은 길이 하늘에서 보면 마치 실로 엮은 듯해 ‘패치워크’라는 이름이 붙었다. 궂은 날씨에도 사람들은 들뜬 마음으로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근처에 세븐스타 나무도 있다. 1976년 ‘세븐스타’ 관광 담배 패키지의 모델로 등장한 뒤 유명목(?)이 됐다. 바로 근처에 ‘켄과 메리 나무’도 있다. 1972년 ‘켄과 메리’라는 닛산 스카이라인 광고에 등장해 역시 유명해진 곳이다. 한 가지 염두에 둘 건 엄밀히 말해 이곳은 공식 관광지는 아니다. 모두 주인이 따로 있는 밭이고 주민들에겐 생활의 터전이다. 당연히 주차장이나 화장실 같은 건 없다. 특히, 농번기 때는 작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비에이의 하늘은 이미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유명한 스폿을 거의 둘러보긴 했지만 아쉬움은 지울 수 없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식당에서 뜨끈한 라멘으로 허기진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비에이의 하늘은 기분을 풀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짝이는 오타루의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