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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우 Dec 03. 2023

자기 이야기만 하는 친구를
오랫동안 참고 견딘 이유

나는 예쁨 받고 싶었다. 그게 누구든지 간에.

누군가에게 잘 보이는 것이 생존과 직결되는 아동기를 보냈다면, 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남의 시선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 쓰는 쪽의 선택을 하며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 조태호, 당신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말만 하던 친구, 

힘든 관계를 끊지 못하던 나



유달리 고민 상담을 자주 해오던 친구가 있었다. 짜증나는 담임부터 수능을 앞두고 모의고사 점수가 안나온다는 둥 불평을 가장한 고민은 마르지 않는 샘같았다. 고민을 가장한 불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충분히 들어주고 공감해 줬다. 하지만 내 이야기도 좀 하려고 운을 띄우면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뭘 그런 일로 고민을 하고 그래"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또 다른 자신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싸구려 건전지처럼 금방 에너지가 닳았다. 일방적인 관계에 지쳐갔다. 결국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로 한다. 그녀가 다가오면 모른 척 교실 밖으로 나갔다. 여러 명이서 같이 이야기할 때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매점을 가자고 하면 피곤하다며 거절했다. 

머리가 좋은 그녀는 내가 밀어낸다는 걸 금방 눈치챈다. 내가 그어놓은 선 밖에서 축 처진 눈으로 기다린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주인 말에 복종하는 강아지처럼 처연한 표정을 짓는다. 


얼마 못 가 금세 마음이 약해진다. 자석에 끌리듯 그녀에게 다가가 옆을 내준다. 그녀는 쪼르르 달려와 얼른 내 옆자리를 차지한다. 다시 같은 패턴이 시작된다. 그녀는 말하고, 나는 듣고, 내가 밀어내면, 그녀는 기다리고. 반복에 반복을 거듭한다. 

그녀에게 벗어날 방법은 없어보였다. 겨울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방학이 되기만을, 졸업하기만을 기다렸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해보였다. 대체 왜 이러는지 그때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졸업 후에도 한동안 자주 연락이 왔다. 매번 시큰둥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만나자는 말에도 차일피일 대답을 미뤘다.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하자 짜릿한 해방감마저 느낀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해방감도 점점 무뎌진다. 안 좋은 기억을 쉽게 빛을 잃는다. 그 자리엔 좋았던 기억만이 반짝거리며 남는다. 어떤 날은 '그래, 그녀랑 잘 맞는 부분도 있었지.'라며 그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힘든 관계를 

붙들고 있었던 이유



그날은 유독 되는 일이 없었다. 우울한 기분으로 터덜터덜 집에 돌아왔다. 냉장고에서 콜라캔을 꺼내 방으로 들어온다. 방바닥에 앉아 콜라 한 입을 마신다. 목구멍을 타고 찌릿찌릿한 기포들이 내려간다. 


갑자기 그녀 생각이 났다. 며칠 전에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는데... 오랜만에 먼저 메시지를 보낸다. 콜라를 다 마실 때까지 연락이 없다. 어쩐지 속이 쓰리다. 휴지통을 향해 찌그러진 캔을 던져보지만, 가장자리를 맞고 튕겨져 나와 방바닥을 뒹군다. '이것도 내 맘대로 안되네.' 방 전체가 커다란 구멍으로 변한 듯 끝없는 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한참 뒤에 그녀에게 답장이 왔다. "어, 오랜만. 나 종일 너무 바빠서 정신없었다." 

그 말에 방바닥을 뒹구는 콜라캔처럼 속이 텅 빈다. 위 속에 들어있는 콜라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 기분은 대체 뭘까? 그녀에게 차갑게 대한 건 나였는데,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내가 얼마나 예쁨 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말이다. 


그녀가 계속 받기만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아 내가 지치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예쁨을 받는 쪽은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그녀가 나를 원하는 게 좋았다.  아무리 밀어내도 강아지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좋았다. 차가운 태도를 보여도 매번 나를 필요로 하는 게 좋았다. 나는 예쁨 받고 싶었다. 그게 누구든지 간에.  

어쩌면 주기적으로 그녀에게 거리를 둔 것도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무의식 중에 그녀의 간절한 시선이 보고 싶었기 때문었을지도...



누군가에게 잘 보이는 것이 생존에 직결되는 어린 시절은 

나를 원하는 누군가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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