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탈리아 피렌체 시내 외곽에 있는 허름한 한 작은 바(bar)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길고 길었던 유학생활의 첫날 아침이었다.
전날 밤늦게 공항에 내려 12시가 넘어서야 호텔에 방을 잡았지만,
시차 때문에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우다가 아침이 밝자마자 찾아들어간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게 안을 가득 메운진한 커피 향내가 카페인 욕구를 확 자극했다.
아침마다 마시던 봉지커피의 달콤한 향도,
당시 한국에 막 상륙한 커피전문점에서 나던 특징 없이 구수한 아메리카노 향도 아니었다.
그 향은 정신이 혼미해질 것처럼 너무도 강렬했다.
“본 죠르노(좋은 아침입니다)”
60대 정도 되는 바리스타가 큰 소리로 이방인을 반갑게 맞았다.
벌써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두 세 명의 손님들의 눈은 일제히 낮선 이방인으로 향했다.
한쪽 구석에 놓인 두 개의 동그란 테이블은 텅 비어있었다. 손님들은 기다란 바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바리스타와 마주 보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바리스타 뒤쪽으로는 웅장한 커피 기계 위로 작은 잔들이 잘 정리되어 있고
그 위로는 각종 술병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한쪽에 마련된 작은 진열장에는 프로슈토(햄)가 듬뿍 끼워진 빵들이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었다.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날 늦은 오후 비행기에서 저녁을 먹은 후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낮선 첫 경험으로 긴장해서인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운 빠니노 에 운 카페, 뻬르 파보레(빵 하나와 커피 한 잔 주세요)”
학교에서 배운 기억들을 떠올리며 더듬더듬 주문에 성공했다.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불룩 나온 바리스타는 마치 수학공식 외우듯 주문하는 젊은 동양인의 말이 끝나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진열장에서 꺼낸 빵 하나를 접시에 담아 건네더니 뒤쪽에 위치한 커피 분쇄기에서 탁탁탁 소리를 내며 포터필터에 커피를 담아 납작하고 커다란 도장처럼 생긴 것으로 몇 번 꾹꾹 누르더니 옆에 있는 육중한 기계에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마치 소주잔처럼 생긴 작은 유리잔을 포터필터 아래에 놓고 단추를 누르자 징~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커피가 약 반쯤 차자 기계를 멈추고 그대로 나에게 건네는 것이 아닌가?
‘헉, 이게 뭐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카페는 곧 에스프레소를 의미하고, 에스프레소는 작은 잔에 담긴 적은 분량의 커피라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다방커피만큼은 아니어도 마실 수 있을 정도는 주어야 할 거 아닌가?'
‘소주잔’에 황당하고 커피 양에 실망했지만 씹고 있던 빵과 함께 원샷으로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야속한 바리스타에게 항의라도 하듯....
정통 에스프레소는 딱 이만큼의 양이다.
“크악~~~”
하마터면 비명을 지르며 씹고 있던 빵을 다 뱉어낼 뻔했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움보다는 이미 빵과 섞여 어찌할 수 없는 쓴 맛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쓴 맛은 더 지독해지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온갖 한약을 많이 경험해 본 터라 웬만큼 쓴 맛은 견딜 수 있는 내공(?)이 있었지만, 그것은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악마의 맛이었다.
그 자리에서 뱉어낼 수 도 없었기에 눈을 감고 그냥 꿀꺽 삼켜버렸다.
“뚜또 베네?(괜찮아?)”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내게 바리스타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체르또(그럼)”
애써 태연한 척하며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왔다.
호텔에 돌아와 몇 번을 물로 헹구어내도 입 안에서는 강한 에스프레소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그 후로 며칠 동안 바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쓰디쓴 맛이 자꾸만 생각나는 것 아닌가?
마치 혀가 그 쓴 맛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마침 한국에서 가져온 봉지커피도 다 떨어져 카페인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이번에는 바에 들어가자마자 사람들부터 살폈다.
뭔가 비밀이 있음에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쓰디쓴 커피를 매일 마시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바에 들어가 테이블에 앉아 자세히 살펴보니 바리스타로부터 작은 잔을 건네받은 사람들은 주둥이에 두꺼운 빨대처럼 생긴 짧은 관이 달린 동그란 병을 기울여 하얀 가루를 두어 번 들이붓더니 작은 스푼으로 두세 번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조금씩 홀짝홀짝 마셨다.
테이블마다 놓인 병을 확인해 보니 설탕이었다.
그렇다, 비밀은 설탕이었다.
‘아~, 이렇게 마시는 거구나.’
“커피 한 잔요.”
비밀을 알아차렸다는듯이 이번에는 다소 호기롭게 바리스타에게 외쳤다.
며칠 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바리스타였다.
내 앞에 놓인 작은 ‘소주잔’ 안에 설탕 병을 두 차례 기울여 설탕을 넣고 스푼으로 서너 차례 휘휘 저었다.
그래도 여전히 두려움은 가시질 않았다.
한 모금을 입 안으로 조심스레 흘려보내 보았다.
‘어?’
처음에는 약간 쓴 것 같았지만 첫 만남의 그 악마의 맛은 아니었다.그러더니 이내 쓴 맛은 사라지고 고소함과 달콤함이 혀를 타고 넘어와 입 안 전체에 강렬한 향을 퍼트려 주었다.
쓴 맛과 단 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묘하게도 새로운 맛을 창조해 내는 것 같았다.
극과 극이 서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정반합 혹은 중용의 맛이라고 표현한다면 지나칠까?
그 후로 나는 바로 에스프레소 마니아가 되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바를 들락거렸다.
그 이후 에스프레소는 나에게 ‘마약’이 되었다.
1573년 이탈리아 대사인 코스탄티노 가르초니(Costantino Garzoni)는 오스만 제국(지금의 터키) 사람들의 커피문화를 이탈리아에 소개하면서 “(오스만 제국 사람들은) 즐겁고 행복한 삶을 위해 아침마다 검은색 음료를 마시는데, 아편으로 만든 이 음료는 고민과 함께 좋은 감정도 잊게 만든다”라고 전하였다.
사실 가르초니가 정확하게 봤을지도 모른다.
식사 후 에스프레소 한 잔이 가져다주는 그 행복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피곤함이나 우울함 따위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니 굳이 마약을 찾을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