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스프레소맨 Dec 15. 2018

02 크레마 미학

크레마와 거품

"징~~~"

우리 부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새로 산 자동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서 커피가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25여 년 전 유학생활 중이었던 우리는 프로모션이라는 꼬임에 빠져 가정용 커피머신을 충동구매했다.

워낙 커피를 좋아했기에 유학생 신분으로는 다소 높은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저질러 버렸다.

아내가 아침마다 마시던 카푸치노까지 만들 수 있게 우유 거품기까지 달려 있었다.  

차에서 내려 머신을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안고 들어와 물탱크에 물을 채우고 바리스타가 하듯이 커피가루를 포터 필터에 잘 다져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흥분된 마음으로 단추를 눌렀다.

앞으로는 각자 매일 두세 잔씩 마시는 1600리라(당시 약 900원)의 커피값을 더 이상 지출하지 않아도 되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초창기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

"엉? 왜 크레마가 안 생겼지?"

뭔가 잘못했나 싶어 이번에는 커피를 더 많이 넣어 단단히 누르고 다시 전원 버튼을 눌렀다.

징~~~

"이상하다..."

"물이 너무 차가운가?"

커피포트에 끓인 뜨거운 물과 커피를 가득 채우고 다시 내려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안삼아 카푸치노라도 만들 요량으로 우유를 넣어 거품을 만들어 보았지만 실망스러운 결과만을 받아보았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한 봉지의 커피와 한 통의 우유를 다 쓸 때까지 밤 새 커피를 내리고 또 내렸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배신감을 느끼고 간단한 결론으로 우리 스스로를 위로했다.

"역시 싼 게 비지떡이야."

그렇게 그 에스프레소 머신은 몇 번 더 진한 아메리카노를 뽑아냈지만,

결국엔 한쪽 구석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가 귀국할 때 폐기 처분되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도 2~3백만 원 하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혼수품으로 인기를 누렸던 적이 있었다.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샀던 것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비싼 것이지만,

이 머신들도 지금 어디선가 장식용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는 잘못이 없었다.

원인은 공기압 때문이었다.

크레마는 원두도 신선해야 하지만 적어도 9bar 이상의 기압으로 뜨거운 물을 밀어내 커피 가루를 통과시킬 때 카페올(커피에 있는 지방)이 녹아 생기는 아주 미세한 거품이다.

우리가 샀던 제품은 워낙 저가의 제품이라 적절한 공기압을 제공해 주지 못하니 제대로 된 크레마를 만들어 주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에스프레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크레마라고 생각한다.

크레마는 적어도 에스프레소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레마가 없으면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그저 진한 커피 농축액일 뿐이다.

커피 농축액과 에스프레소는 화학적  성분은 같겠지만, 나는 그것을 결코 에스프레소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아는 에스프레소에 대한 예의일 것이기 때문이다.


크레마도 다 같은 크레마가 아니다.

너무 많아서도 너무 적어서도 안 된다. 커피 양의 10% 정도가 적당하다.

분량은 10%에 불과해도 중요도는 50% 이상이다.

크레마의 질도 중요하다.

너무 묽어서도 너무 진해서도 안 된다.

설탕을 넣었을 때 살짝 설탕을 품고 있다가 슬며시 안으로 스며들게 하고 스며든 빈자리를 재빨리 메꾸어 주어야 좋은 크레마이다.

색깔도 너무 검어서도 너무 밝아서도 안 된다.

좋은 크레마는 황금색을 띠고 줄무늬가 형성되기도 하는데 이를 타이거 스킨(tiger skin)이라고 한다.  

크레마의 입자가 너무 크다
크레마가 부족하다

크레마는 에스프레소를 완성하는 옷과 같은 것이다.

크레마는 1차적으로 커피를 따듯하게 유지시켜 주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크레마 속에 녹아 있는 풍부한 향이 진한 커피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준다.

게다가 커피를 황금색으로 살며시 덮어주어 에스프레소에 신비감마저 더해 준다.

사람도 슈트를 차려입으면 모두 멋진 신사가 되는 것처럼,

에스프레소도 멋진 크레마가 덮어주면 완벽한 에스프레소가 된다.

새까만 맨 몸을 가려 부끄럽지 않게 해 주면서도 그 커피를 더욱 풍부하게 해 주는 것이 크레마인 것이다.


에스프레소의 크레마는 커피를 마실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아메리카노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솔직한 커피이지만 신비감이 없다.

시각적으로도 이미 기대되는 맛이다.

입으로 들어올 때부터 '나는 그저 커피야, 나에게 더 이상 뭔가를 바라지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메리카노인가 보다.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이다.

딱 그만큼의 값어치만 하는 커피, 그것이 아메리카노이다.


에스프레소는 다르다.

크레마가 커피를 살며시 감추어 맛에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러면서도 지나친 법이 없다.

가짜 크레마(우유 거품)가 잔뜩 덮고 있는 카푸치노는 커피를 과대 포장하고 있다.

라떼아트까지 곁들인 카푸치노의 겉모습만 보면 화려하다.

하지만 거품이 입술을 잔뜩 코팅한 다음에야 우유인지 커피인지 정체성이 모호한 액체가 입 안으로 들어온다.  

거품에 향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카푸치노를 덮고 있는 것은 크레마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거품이라고 한다.

명확한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거품이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드라마에서 봤던 거품키스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딱 맞는 커피일지도 모르겠다.


에스프레소는 다르다.

크레마가 입술에 살짝 닿는 순간 진한 커피가 입 안으로 들어와 진한 향을 퍼뜨려 준다.

크레마는 거추장스러움보다는 커피와 완벽하게 어울린다.

적절히 포장되어 있으면서도 솔직하다.

타이거 스킨을 가진 크레마

한 때 우리 부부는 크레마에 집착한 적이 있다.

배신당했던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크레마를 만들어보려고 커피 한 봉지를 다시 사서

수십 번의 커피를 내리고 버리기를 반복했었다.

그토록 기대하던 크레마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TV 광고에서 보여준 크레마를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이탈리아 각 가정에는 모카커피 포트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마키나라고 부르는 이 포트는 물을 끓여 증기를 이용해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의 장치이다.

집에서나마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마시기 위한 것인데,

이 포트로는 아무리 해도 크레마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저 진한 커피만을 만들어줄 뿐이다.

원인은 뜨거운 증기를 밀어내는 압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모카포트

그런데 이 모카커피 포트로 뽑아낸 커피에 크레마를 만드는 방법이 있다.

물론 짝퉁 크레마지만 말이다.

같은 시기 유학하던 선배에게 이 방법을 전수받고는 한 때 열심히 만들어 마셨던 적이 있다.

우선 모카포트로 커피를 끓인다.

그리고는 에스프레소 잔에 설탕 두 세 스푼을 넣는다.

커피가 끓어 위로 약간의 커피가 추출되기 시작하면 바로 불을 끄고 커피 한 두 방울을 설탕에 떨어뜨린다.

그러고는 열심히 스푼으로 설탕을 젓는다.

이때 설탕을 그냥 젓는 것이 아니라 볼록한 부분으로 설탕을 짓이기면서 저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힘이 필요하다. 적어도 100여 차례는 저어주어야 한다.

그러면 잘게 으깨진 설탕이 커피와 섞여 크림과 같은 형태가 만들어진다.

이때 끓여낸 커피를 잔에 따라주면 황금색 크레마를 가진 에스프레소가 만들어진다.

물론 맛은 약간 다르다.

하지만 기분은 낼만큼 충분한 에스프레소 생김새는 만들어준다.

단점은 이 작업은 반드시 남자가 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러 번 하다 보면 어느새 팔뚝에 근육이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01 프롤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