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오빠.
당신은 분명히 오빠가 맞을 거예요.
한눈에 봐도 '대학생'처럼 보였거든요. 저는 그때 고등학생이었어요.
저는 아무에게나 '오빠'라는 말을 쓰진 않아요. 제겐 두 살 많은 친오빠가 있고 네 살 많은 친언니가 있는데 우리 오빠와 우리 언니에게만 '오빠' '언니'라고 부르고 다른 연장자들에게는 좀처럼 오빠라고 부르지도 않고 언니라고 부르지도 않아요.
하지만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그날의 당신을 그냥 '오빠'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는 그날 대학생이던 언니와 명동에서 옷쇼핑 중이었어요. 토요일이었고요.
토요일도 4교시까지 수업을 했었던 시절을 많은 사람들은 잊었겠지만
예전엔 분명히 토요일도 매주! 학교를 갔었죠.
수업을 마치고 명동까지 지하철을 타고 갈까 버스를 타고 갈까 고민하다가 그날은 버스를 탔어요.
토요일이니까요. 바깥 구경도 하고, 동호대교 위에서 한강을 쳐다보고 싶었어요.
대학생이던 언니와는 언제나 그렇듯 명동 금강제화 앞에서 만나거나 국민은행 본점 앞에서 만났거나
아니면 그날은 명동 돈가스에서 만나 아예 돈가스를 한 접시씩 먹고 쇼핑을 하려고 했을 거예요.
세뱃돈이나 생일선물처럼 받았던 금강제화 상품권, 에스콰이어 상품권, 롯데 백화점 상품권등을 지갑에 넣고 명동 주변을 우리 자매는 신나게 조잘대며 걸어 다녔겠지요.
그리고 나선 언제나 빠지지 않는 그 골목.
명동성당에서 쭈욱 명동 큰 길로 내려오다 보면 처음이나 두 번째로 만나는 옆 골목.
그 당시 옷 좀 입는다 싶은 여자애들이 열광하던 그 골목,
빌리지, 포스트카드, 논노 같은 옷가게가 한 줄로 쭈욱 들어서있던 그 골목.
거기에서 오빠를 보았어요. 정확하게는 '빌리지'라는 옷가게 안에서 오빠를 보았어요.
'빌리지'에서 이리저리 옷을 고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게 밖 좁은 골목에서 여자들이
하는 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우다다다 첩첩첩첩 하는 밑창이 딱딱한 신발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어머, 어디서 또 데모하나 보다 (네, 그 당시 서울에 살면 최루탄과 시위와 화염병에 익숙하죠)
저는 그냥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뒤적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청점퍼를 입고 청바지를 입고 머리엔 견고해 보이는 헬멧을 쓴 남자들 네다섯 명이 제가 옷을 고르고 있던 그 가게 '빌리지'로 번개처럼 들어와서 가게 한쪽 구석 아래에 숨어 있던 오빠를 끌고 나갔어요.
저는 솔직히 거기에 오빠가 있었는지도 몰랐어요. 그 구석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죠.
그 견고해 보이는 헬멧은 원래는 흰색인 것 같았는데 여기저기 흠집이 나서 은색이나 회색으로도 보였어요.
그 헬멧을 쓴 남자들은 오빠보다 훨씬 덩치가 좋고 운동을 많이 한 것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그 헬멧 남자들 중 두어 명은 연신 방망이 같은 것으로 오빠를 여기저기 무차별적으로 때리고 있었고
한 명은 오빠의 머리채를 주먹으로 쥐고 가게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가게 안에서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과 손님들, 그리고 가게밖 골목에서 웅성대는 사람들에게 눈알을 부라리며 "비켜! 꺼지라고!" 막 이런 말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날 처음 보았어요.
사람이 사람을 몽둥이로 그렇게 심하게 때리는 것을요. 그리고 사람의 머리카락을 그렇게나 우악스럽게 움켜잡고 흔드는 것을요.
아마도 우리 자매는 그날 평소 때처럼 각자 사고 싶은 옷을 몇 가지 사서 룰루랄라 집으로 잘 들어왔는지도 몰라요.
그리곤 오빠를 잊었는지도 몰라요. 저는 오빠를 궁금해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오빠는 그날 그들에게 잡혀간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대충 경찰서에 잡혀 갔다가 반성문을 쓰고 풀려났는지 그대로 군대로 끌려갔는지 아니면 혹시 고문을 당하고 엄청난 고초를 겪다가 ###열사 가 된 건 아닐까요?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의 내가 부끄러워요.
그리고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오빠에게 무한히 미안하죠.
이렇게 한 마디쯤은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아무리 그때 고등학생이었다고 해도 말이에요.
미안했어요. 내가 그때 한마디도 못해줘서.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 옷쇼핑을 해서.
정말 미안했습니다.
바라건대, 부디,
오빠가 어디에선가 아주 잘 나가는 중년 부자 남자가 되어 다복한 가정을 이루며 잘살고 있기를 바라요.
지난 수십년간 잊고 있었던
백골단의 기억을 활활 다시 일깨워 준
어떤 국회의원에게 읽어보라고 던져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