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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 Apr 08. 2022

설렘과 그늘 사이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엄마의 옷장은 나니아 연대기에서 나오는 것보다 훨씬 컸다. 한쪽에는 타원형으로 문짝만 한 거울이 붙어 있었고 거울 위, 아래로 꽃과 잎이 달린 덩굴이 조각되어 있었다. 미닫이 옷장이었지만 뻑뻑하지 않고 작은 바퀴가 달린 것처럼 매끄럽게 밀리고 닫혔다. 오른손으로 장을 잡고 왼손으로 문을 당겨야 했던 나는 닫히는 속도보다 민첩하지 못해 몇 번 손가락을 물렸다. 그 어마어마했던 장롱 안은 이불과 옷가지 외의 이상한 것들로 꽉 차 있었고 나프탈렌 냄새도 풍겼지만, 숨바꼭질하다 잠들 만큼 아늑하고 편안했다.      


청소기가 없던 그 시절. 엄마는 매일 빗자루로 방을 쓸고, 물걸레질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집은 늘 지저분하게 보였다. 그 이유는 한참을 더 자라서 알았다.

      

장롱에 달린 거울 앞에 앉아 꾸밈을 했던 엄마는 화장대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화장품은 연두색 플라스틱 대야에 들어가 있었다. 엄마가 대야를 끌어안고 바닥에 앉아 화장을 할 때면 나도 옆에 앉아 이것저것 한참을 참견했다. 영양크림 통은 대자라 한눈에 들어왔고, ‘쥬단학, 아모레’ 같은 화장품들도 있었다. 옆집 살던 미제 아줌마 덕분에 영어가 쓰인 립스틱도 보였고 손톱깎이도 들어 있었다. 현란한 꽃무늬 비닐로 만든 헤어캡은 고무줄에 묶여 있었고 돌돌 말린 양말도 들어가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건 팔레트 안에 들어있던 아이섀도였다. 한 번씩 엄마가 눈에 칠해주긴 했지만 피부 망가진다며 이내 지웠다. 연두색 대야는 보물함 같았다.   

       

그날은 외할머니와 이모들이 오는 날이었다. 순식간에 집안을 정리하는 엄마가 잊히지 않았다. 재봉틀 위로 널려있던 옷들은 대충 말려 장롱 안으로 처박히고, 텔레비전 위에 있던 고지서와 접힌 신문들은 장롱 밑으로 들어갔다. 웬만한 건 다 장롱이 삼켰다. 엄마의 정리는 일단 눈에 띠지만 않으면 되는 거였다. 필사적으로 훑어 숨기는 데 성공한 집안은 어쨌든 말끔해졌다. 

그렇게 닫힌 장롱은 문이 밀릴 때마다 쌓인 것을 쏟아내고 무너트렸지만 충분히 제 할 일을 다 했다.      

그랬던 엄마의 유품 정리는 의외로 간단했다. 그 나이가 되면 의례적으로 해야 하는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는 미리 준비했던 것 같다. 날씨 좋은 날에는 옷장에서 코트를 챙겨줬고, 혼자 찾아갔던 날엔 쌍가락지를 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언니는 십자가 목걸이를 받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그저 쌍가락지였고, 목걸이였지만 엄마에겐 할머니의 유품이었고 결혼예물과 바꾼 십자가 목걸이였다. 

작은 서랍장 안에서 오래된 수첩과 빛바랜 메모지들이 나왔다. 낱장으로 된 메모지는 대부분 성경구절과 자식들을 위한 기도문이었고, 지금은 사라진 ㅇㅇ은행 수첩에는 식구들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간간이 누가 언제 다녀갔는지 날짜가 적혀 있었고 아버지와 어딜 다녀왔다고 쓰여 있었다.    

    

-- 수첩 --     


사실에 소다를 넣고 사연을 부풀려

빈칸마다 그날을 빼곡하게 담았다

문뜩 찾아본 어느 해 7월은 쓰레기 같았고

하얗게 비어있는 서너 달은 게을렀던 모양이다     


어딘가에 갇혀 있어도 갇힌 줄 모르고

도망가는 세월만 따라갔던 여행자 

같이와 가치를 구별할 줄 아는

어른의 일화는 젊음보다 아름다웠다    

 

부쩍 늘어난 숙제. 언제부터 어떻게 정리를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방 안을 둘러보면 ‘손길이 닿지 않는 곳부터’라는 지시등이 켜진다.  

기억의 한계도 있는데 얼마만큼 저장하고 버려야 하는지 견적을 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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