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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굴비 Sep 10. 2015

사장님은 위장취업 중

언더 커버 보스,  한국 공기업에 가다

안녕하시오. 피디 양반.

지난 '언더 커버 보스 - 공기업'편에 출연한 '양영 홍고추 유통공사'의 양 사장이오. 저번 주 촬영 이후로 사무실에 연락이 없어, 추가 촬영은 언제 하는지 궁금하여 메일을 보내오. 그대는 갓 부임한 나에게 '경영자가 근로자로 위장취업을 하여, 사원들과 정을 나누고, 근무분위기를 알 수 있다'는 취지의 기획서를 보내주었지요. 이후에 당신 대신 온 작가들은 기업에서 '위, 아래'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느니, 신임 사장의 인간적인 모습이 전파를 탄다면 '정권의 낙하산'이라는 오명도 벗을 수 있다고 말했지요. 나는 참 잘 되었다고 생각했소. 그렇게 나는 나이 많은 '낙하산 신입사원'으로 위장취업을 할 수 있었소. 당신은 숨어서 모든 과정을 촬영했겠지요.


촬영한 테이프를 보았다면, 내가 처음 들어와서 한 일이 무엇인지 알겠지요. 그렇소. 쌍팔년도에나 만들어졌을 법한 공사 매뉴얼 하나 들고, 사무실 구석에서 멍청하게 서 있는 것이었소. 나보다 어린 선임이라는 자는 사무실 자리가 정리될 때 까지 기다리라면서, 자기 자리에 앉아 낄낄대면 야구나 쳐보고 있었다오. 아직도 이 놈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방송이 나간 후에 당황할 녀석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아직도 내색을 안 하고 있다오. '김. 신. 철' 이 개새끼. 걔를 누가 뽑았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내 재임기간 중 김씨는 뽑지 않을 생각이오. 몇 시간이 지나자 선임 놈은 나를 사무실 밖으로 조용히 불러냈다오. 그는 이곳 공사 직원들과 어울리려면 '노조'에 가입해야 한다고 말했소. 하하. 그렇게 나는 노조에 가입한 최초의 사장이 되었소.


나는 제작진들이 나를 경영팀으로 배치해준다고 들었소. 하지만 선임 놈은 내가 '한글'도 '엑셀'도 다루지 못한다면서 생산팀으로 추방했소. 나는 극히 반대하며 차라리 사무실 나무에 물을 준다거나, 청소를 한다거나, 같이 야구를 보자고 하려 했소. 하지만 사무실 안은 남아도는 '청년인턴'들이 '열정페이'만 받고도 열심히 잡무를 보고 있었소. 젠장, 젊은 노예 놈들. 그 놈들도 정규직으로 전환될 생각은 말아야 할 것이오. 아무튼 나는 공사 밖에 있는 홍고추 건조기 라인으로 재배치되었소. 여기엔 매뉴얼은 없었지만, 온통 외국인 노동자뿐이었소. 그 놈들은 한눈에 내가 밀려나온 것을 알고, 자기 나라 말로만 대화를 하며 나를 철저히 무시하더군. 나는 여기에서 뜻도 모를 욕을 들어가며 오후 내내 고추를 말리고 있었소. 촬영만 끝나면 나는 모두를 말려버릴 계획이오. 아, 이 사실은 편집해주시오.


피디양반. 피디양반은 추가 촬영 때 전 직원 앞에서 내가 위장 취업했던 사실을 밝히고, 인상 깊었던 사원들에게 포상을 내린다고 했지요. 나는 나를 노조에 가입시키고, 생산팀으로 내쫓은 김신철 그 새끼와 고추 건조장에서 나를 보고 형, 형 거리며 돈을 빌려달라면서 지갑을 가지고 도망간 이름 모를 외국인 노동자 놈, 근무가 끝나고 회식이라며 나를 데려가서 술을 먹이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뺨을 때리던 부장 놈이 인상 깊었소. 이게 모두 촬영이 된 것이 맞긴 하오? 피디 양반, 위와 아래는 기름과 물처럼 섞일 수 없소. 갑을소통? 이것은 입장만 바꾼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오. 당신은 너무 이론적이고, 감상적이오. 피디양반, 그러고 보니 왜 작가만 얼굴을 보고, 피디양반과는 메일로만 대화를 나눈 것이오? 그래서 그간 피디양반 이름도 몰랐다오. 아 메일 주소가 피디양반 이름인가 보고만, ki..m..shin...cheol....@#$%^%야 이 개샜ㄲ야!


- 언더커버보스 보다가 낙하산인사가 떠올라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 김신철은 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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