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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굴비 Sep 12. 2015

개천에서 용맛나

성공사회 함유량의 비극

나는 택시 아저씨의 좋은 이야기동무다. 


아마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습관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택시 아저씨는 학교를 가는 길에 "저기 풀밭에 핀 꽃의 이름을 아느냐"부터, "우리는 저것을 먹고 자랐다."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택시 아저씨는 피곤함이 가득한 젊은 친구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힘을 내라고 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이 화근이 되었다. '개천에서 용나면 안 된다'라는 책을 들고 있던 것이다. 젊은이를 응원하던 아저씨는 책 표지를 보시고는 불온서적을 보듯 화를 내셨다. "아니, 젊은 사람이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아저씨는 자신의 성공한 친구들부터, 친척의 친척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지, 자네 학생인가?" "아니요. 졸업했어요." "그럼 학교를 왜  가... " 차마, 이 책의 저자분의 강의를 듣는다고 말은 못했다. 강의실까지 쫓아오실까 봐.


바야흐로 나는 '개천에서 용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 많은 택시 중에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소위 성공한 용들의 무용담을 들을 수 있다. 학교에는 무슨 고시에 합격했다는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들이 펄럭이고, 서점에는 성공한 졸부(졸지에 부자)들이 부자가 되는 비법을 담은 책들을 판매하고 있다. 지금은 취업준비생이라 친구들을 잘 만나지 못하지만, 인터넷으로 접하는 친구들의 소식은 모두 '어디, 어디에 갔네, 먹네' 등의 즐거운 일상뿐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긍정적인 나도 영화 '트루먼쇼'의 '트루먼'처럼 세상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 '나만 빼고 전부 성공하는 건가?' 물론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주변에 장식된 다른 사람들의 (가짜로) 성공한 삶과 비교당하는 것이 무서워, 스스로도 자신을 좋게 포장하기 바쁘다. 좋은 일이 있으면 타임라인 위에 올려야 하고, 작은 경험을 부풀려 자기소개서를 쓰기 바쁘다. 또 동생들이나, 이성을 만나면 자랑해야 할 거리들도 생각해 놔야 하지 않겠는가. 나를 만나는 사람은 또 내가 엄청 성공한 줄 알겠지. 악순환은 반복된다.


최근 하버드대학과 스탠퍼드대학에 동시 합격한 천재한인 소녀의 이야기가 국내를 뒤흔들었다. 두 대학을 저글링 하듯 오가며 수학을 하고 자신이 원하는 학교의 졸업장을 받게 된다는 말도 충격적이었지만, 며칠 후 이것이 거짓말이었다는 후속보도가 뒤따르며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한 기사는 '한국의 학벌 중시 사회'가 '학력위조'사건을 일으킨다면서 다른 정치인, 연예인, 종교인들의 학력위조 사례와 이 현상을 심도 있게 다뤘다. 하지만 기사의 베스트 댓글은 "그럼 최화정 고졸인데, 명문대졸이라고 깝죽거리고 다닌 거였음?"이었다. 이 댓글에 달린 공감수를 보며, 학벌계급사회가 당장에 무너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거짓말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묻고 끝낸다면, 제2의 제3의 천재한인 소녀의 거짓말이 계속 나올 것이다. 출신지, 학력, 직장 등 사회에 계급이 나누어져 있고, 그 경계를 넘기가 쉽지 않아진다면 '거짓말'이라도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고 싶도록 만드는 사회도 무섭지만, 우리 사회가 스스로 거짓말을 함으로 이런 환경을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개인을 둘러싼 사회환경은 지나치게 밝은 전망만을 보여준다.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경제가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등의 확신에 찬 희망의 메시지가 오히려 현실과 비교되어 삶을 팍팍하게 만든다. 한 때 인터넷에서 유행한 '허니버터 칩'은 없어서 못 파는 이례적인 인기를 끌었다. 제조사인 해태제과는 '1년 9개월 동안의 연구로 가장 적합한 꿀의 배합을 찾은' 것을 비결 중 하나라고 밝혔다. 하지만 허니버터칩의 꿀 함유량은 0.01%가 조금 못된 수준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꿀맛을 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회는 함유량을 밝히지 않고,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개천에서 용나는' 사회를 여전히 외치고 있다. 사실 이제는 함유량이 점점 줄어들어 '개천에서 용맛'만 희미하게 나는 사회다. 정말 해야 할 것은 허탈한 거짓말을 멈추고, 개천에서 용을 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 강준만 교수님의 책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를 재미있게 읽다가 쓴 글입니다.
- 강준만 교수님도 이 글을 재밌게 읽어주셔서 경남도민일보의 <[특별기고]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에서 샤라웃 해주셨습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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