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기 싫어도 뛰어야 하는 것. 뛰지 않아도 발이 절로 내달리는 것.
초등학교 시절에는 한 살 차이가 너무너무 크게 느껴졌다. 1학년 때는 2학년이, 5학년 때는 6학년이 그렇게 무서웠다. 저 6학년 오빠가 짱이래. 완전 무섭고 싸움도 잘한대. 중학교 언니 오빠들이랑도 많이 알고 지낸대. 그런 말들이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숙제를 안 한 날이면 엄마에게 듣는 '너 그럴 거면 이 집에서 나가라'는 말에는 매일 듣는 안부 인사마냥 눈도 끔쩍 않는, 되바라진 초딩에게 어쩌면 그들은 부모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6학년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면 눈을 슥 깔고 바닥만 보며 지나가곤 했다.
지금은 다른 의미로 한 살 차이가 너무도 커 보인다. 얼마 전 드디어 내게 당도하고 만 스물여섯이 바로 그렇다. 내가 스물여섯이라니. 내가 스물과 서른 중 서른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 이렇게 커 버렸지. 언제 이렇게 자라버렸지. 이제는 '컸다', '자랐다'라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그렇다고 '늙었다'를 쓰기에는 또 좀 머쓱한 나이.
앞자리가 2로 바뀐 것에 기뻐하며 술을 퍼마셔 댔던 따끈따끈한 주민등록증의 갓 스물도, 우리도 이제 '사망년'이라며 한탄하던 스물둘도, 너 이제 한물갔다는 개소리를 하는 복학생 선배의 정강이를 시원하게 걷어 까던 스물셋도 홀연히 떠나버리고 스물과 서른 그 중간까지 숨이 차게 달려왔다. 사실 달리고 싶어서 달린 건 아니고 다들 트랙 위에서 미친 듯이 뛰길래, 음, 자연스레 등 떠밀려 쉬지 않고 뛰어왔더랬지. 나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 뛰기 싫어도 뛰어야 하는 것. 뛰지 않아도 발이 절로 내달리는 것.
그런데 그마저도 이제 떠나 나를 기어코 스물 후반께로 밀어놓는다. 서른, 마흔, 혹은 그 이상의 어른들에게는 이러나저러나 어리고 젊고 곱게만 느껴질 걸 알지만, 그건 어쨌든 내 시선은 아니니까. 지금의 내게는 내 것도 벅차서, 한 살 한 살이 너무도 커서 해가 바뀔 때마다 마치 산꼭대기에서 돌덩이가 굴러떨어져 나를 덮치는 것만 같다.
매해 커다란 돌덩이에 깔리는 기분으로 시작하는 새해.
가슴 속에 덜그럭거리는 돌덩이가 스물여섯 개가 된 셈이다.
처음 스물다섯이 되던 해, 그러니까 이제는 작년이 된 2020년의 초반. 나와 동갑인 사람들이라면 모두 이 노래들, 꼭 아니더라도 비슷한 류의 노래를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송지은의 예쁜 나이 25살.
아이유의 팔레트.
노래가 나왔을 때 나는 각각 열아홉, 그리고 스물둘이었다. '예쁜 나이 25살'이 나왔을 때 교복을 입고 있던 내게 스물다섯은 너무너무 먼 나이였기에 노래의 가사보다는 가수의 예쁜 얼굴, 의상, 그리고 무대에 집중해 열광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당당하게 자신의 나이를 어른답다고 말하는, 즐기는 가사가 멋지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하기는 했다.
시간이 더 흘러 '팔레트'가 나왔을 때 그 느낌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열아홉에게 스물다섯은 까마득한 어른이지만, 스물둘에게 스물다섯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쨌든 '현실'이 되어 있어서 그랬을 거다. 여러모로 나는 그 노래와 사랑에 빠졌다. 평소 아이유의 어마어마한 팬이었고, 그녀가 가지고 나온 컨셉 또한 내 취향에 딱 들어맞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노래의 가사가 내가 꿈꾸는 스물다섯 언저리, 나의 이상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충분히 사랑하고 아끼고 있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의 노래.
막연하게 될 수 있겠지 생각했다. 아이유가 부르는 노래 속의 어른 말이다. 누군가 날 좋아하는 걸 알고, 날 싫어하는 걸 알고, 그 이유를 알고 그 모든 것들을 납득할 수 있는 어른. 그래서 이젠 날 좀 알 것 같다는 완벽하게 어른스러운 엔딩까지 모두 내 것이 될 줄 알았다. 그만큼 나도 나를 잘 알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확신이란 걸 좀 갖고 싶었다.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될 거라고 감히 믿었고 함부로 설렜다.
그래서 그토록 두려워하며 갈망하던 모순의 스물다섯을 지나온 지금,
나는 저런 어른이 되었나?
잘 모르겠다.
더 정확히는, 전혀 모르겠다.
일종의 낭패다.
오래도록 스물다섯은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큰 어른. 여물대로 여물어 세상을 잘 아는 어른. 스무 살부터 어른이라는데, 스물다섯이면 그로부터 다섯 해를 더 지냈으니 충분히 어른이겠지. 스물과 서른 딱 가운데에 있는 나이니 아무렴 어른이겠지.
하지만 스물다섯을 막 보내주고 난 지금, 내 정신 상태는 스무 살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스물여섯이 된 몸뚱아리에 여전히 스물에 머무른 정신이 갇혀있는 것도 같다.
해가 바뀌었는데도 나는 너무도 어리고 미래 역시 여전히 불투명하다. 어느 것 하나 나를 안심하거나, 정착하거나, 마음 놓고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그럴 것들을 하나도 온전하게 꾸리지 못한 삶이고 그게 한편으로는 우울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하지도 않은 나이다. 그렇지 못해도 마땅한 나이다. 꿈에도 몰랐다.
물론 누군가는 스물다섯을 들어 이젠 늙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디먼 젊은 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누가 뭐라고 말하든 휘둘리고 싶지 않지만 사람이란 참 간사해서, 전자의 말을 들었을 때는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절망감에 휩싸였다가도 후자의 말을 들으면 나의 창창한 미래에 대해 다시금 희망찬 생각을 한다. 우스운 일이다.
예쁜 나이 25살.
나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 나이가 예쁘다네.
그렇다네.
지나 봐야 예쁜 줄 안다고들 하니까,
나도 보내주고 나서 나중에, 예뻤다고 차차 생각해주기로 한다.
여드름투성이에 질끈 묶은 머리, 만년 체육복만 걸치고 다니던
열여덟의 내가 감히 예뻤다고 생각되는 지금처럼.
그 자체로도 충분히 빛났는데, 그걸 모르고 그때의 나를 너무도 미워했던 내가 나한테 미안해서.
이제라도 언젠가 지나고 나면 그때 역시도 빛났었다 생각할 지금을
어떻게든 소중히 여기고 품에 안아 광이 나게 닦아주려고.
어떻게든 미워하지 않고 쓰다듬어 주려고.
잘했다, 이월아.
애썼다.
스물다섯 한 해를 또 이렇게 무너지지 않아 줘서,
버텨줘서 고마워.
그리고 만나서 반가워.
잘 지내보자, 스물여섯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