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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 Feb 21. 2021

내 생애 가장 어린 날의 기억

이건, 나름 좀 멋진 일이다.

누구에게나 생애 가장 어린 날의 기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갓난아기 시절을 기억할 리는 드물 테니, 기억이 존재하는 가장 오래전으로 돌아가면 떠오르는 어떤 장면이라든지, 또렷한 사건 같은 것. 내가 가진 가장 어린 기억은 대략 다섯 살쯤인데, 일상적인 풍경이 대체로 기억나는 것은 그보다 늦은 일곱 살쯤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일련의 사건만이 강렬하게 나의 다섯 살 기억의 한 조각을 담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어쩌면 아주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했다. 어린이집을 무려 세 살부터 다녔기 때문이다. 세 살부터 다섯 살까지 평화 어린이집을 다니다 여섯 살부터 졸업까지를 후에 다니게 된 초등학교의 병설 유치원에서 보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두 어린이집은 어린 내 걸음으로도 충분히 왕복할 만큼 꽤 거리가 가까웠는데, 평화 어린이집을 떠난 이유에 어쩌면 이 사건도 아주 조금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부분은 부모님의 확인 작업이 필요할 것 같지만.)




시작은 싸움이었다. 왜 싸웠는지, 어쩌다 싸웠는지는 잘 기억 나지 않는다. 다섯 살짜리들이 싸워 봐야 얼마나 대단한 일로 싸웠을까. 별것도 아닌 일이었겠지. 다만 동갑내기 남자아이와 죽어라 싸웠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머리를 쥐어 잡기도 하고 주먹을 되는대로 휘두르기도 하고 손톱을 세워 할퀴기까지 하며 다섯 살 꼬맹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싸웠다. 서로 전력을 다한 싸움에서 우리는 각자 상처를 입었는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그 아이의 손등을 콱 긁어 피를 본 나와 달리 그 아이는 내 얼굴, 정확히 오른쪽 뺨의 한가운데를 깊게도 긁어버린 것이다. 생채기가 제대로 나 피가 나는 뺨을 부여잡고도 한 성질머리를 했던 나는 이를 앙 물고 훌쩍거리며 눈알이 빠져라 친구를 노려보았고, 그놈이라고 부르고 싶은 아이도 우는 나를 따라 제 손등을 붙잡고 엉엉 울어제꼈다. 얼굴은 기억 나지 않는 당시 5살 교실의 선생님이 울음소리를 듣고 어디선가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두 아이의 엄마들은 어린이집에서 만났다. 애들끼리 좀 싸운 것 가지고 굳이 둘이나 나설 필요가 뭐가 있냐며 아빠는 오지도 않았다. 요즘만 같았으면 서로의 아이와 그 부모, 더 나아가 가정교육이 어쩌고 헐뜯으며 고소를 하네 병원비를 청구하네 마네 험악하고 돈 냄새 나는 대화를 나눴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때는 아무튼 2000년이었다.


딱 20년 전, 우리 엄마와 그 애의 엄마는 멋쩍게 마주한 자리에서 인사를 나눴다. 이어 선생님의 자초지종을 듣고 아이들의 얼굴을, 손등을 슬쩍 확인하고는 서로 연신 사과했고 아이들을 사과시켰다. 그냥 그게 다였다.

우리는 뚱한 얼굴로 얼굴에, 손등에 거즈를 붙인 채 손을 맞잡았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나도 미안해. 하나 마나 한 사과도 주고받았지, 아마. 이월이 얼굴 어떡해요, 하고 걱정하는 그 아이의 엄마에게 모르긴 몰라도 우리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웃어주었을 것 같다.


애들끼리 좀 싸운 건데요, 뭐.




애들끼리 좀 싸웠다고 사나운 말 한마디, 돈 한 푼 오가는 것 없이 평화롭게 마친 평화 어린이집에서의 그날의 대담은 두고두고 우리 집에서 후회로 회자된다. 금방 아물 줄 알았던 내 얼굴은 영영 회복되지 못했고, 여태 오른쪽 뺨에 흉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아이의 손등은 내가 여섯 살이 되어 다른 어린이집으로 떠나기도 전에 이미 깔끔하게 아물어있었다.)


그때 막 버럭 화를 냈어야 됐는데, 왜 그랬지.

그때는 그냥 다 그랬지.

그리고 금방 아물 줄 알았지. 이렇게 평생 갈 줄 알았나?

여자애 얼굴에 이렇게 흉터를 그어놓고 말이야.


맨얼굴로 거실을 활보하는 내가 눈에 띄면 엄마와 아빠는 대략 열 번 중 한 번 정도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는 저런 소리를 했다. 아주 가끔은 아예 두 손을 뺨에 턱 붙이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러기도 했다.


에휴, 에휴, 속상해.


별일 아닌 줄 알고 병원도 제대로 안 가고 연고나 열심히 발라 줬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병원도 아주 출석 도장 찍듯이 갔어야 했다고. 가서 진단서 딱 끊고, 병원비 청구도 하고, 흉터 제거 어쩌고 값도 받아냈어야 했다고. 항상 레퍼토리는 비슷했지만, 그 비슷한 게 이십 년을 갔다. 어느덧 이십 년이 지나 볼품없이 비어버린 건물터만 남은 어린이집에서의 일을 가지고 아직도 드문드문 말을 꺼내는 엄마 아빠가 웃겨서 나는 항상 대꾸했다.


그러게 말이야, 민재 그놈!

내가 이름도 아직 외운다. 평생 안 까먹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같이 어깨를 씨익씨익, 이를 부득부득 갈다 보면 또 웃음이 터졌다. 그 오래전 일을 여전히 이렇게 회상하면서 우리 가족은 종종 웃는다.




사람마다 생의 일부분에 매기는 중요도는 다른 것이라, 다행히도 내게는 외적인 부분에 큰 미련(?)이나 강박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내 흉터를 크게 인식하고 지내지 않는다. 내가 얼굴을 가꾸는 일에 지금보다 훨씬 더, 특별히 관심이 많았다면 매일같이 그 흉터를 보며 슬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우리 가족은 웃으면서 이런 얘기를 할 수도 없었을 거고, 열 번에 단 한 번일지라도 내 흉터가 눈에 걸릴 때마다 우스갯소리를 하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대신 나를 따라 말없이 속상해했겠지. 그러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 얘기가 진지하고 무거운 기억이 아닌 우리 가족의 잊지 못할 재미있는 사건으로 남을 수 있어서 좋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갑자기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빠, 있잖아. 그때 기억나? 나 유치원 때 얼굴 긁힌 거. 응? 언제? 뭐? 이런 말이 잦은 우리 부모님이 그 한 마디에 단박에 알아차릴 만큼 모두에게 또렷한 그 날의 에피소드.


그냥, 오늘은 갑자기 문득 이렇게 가볍고 맥락 없지만 조금은 귀여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내 역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내 생애 가장 어린 날의 기억.

눈에 보이는 얼굴 한가운데에 남겨진.


나는 일흔의 할머니가 되어도 다섯 살의 기억 단 하나만큼은 잃지 않을 수 있는 셈이다.

이건, 나름 좀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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