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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스누피 Sep 14. 2024

그날 이후 나는 죽음을 준비했다.

치매인 엄마와 다투고 온 그날 내가 결심한 것.

조금이나마 아빠에게 쉬는 시간을 주기 위해 주말마다 친정에 갔다. 워킹맘인지라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도 필요했기에 매주 가지는 못했지만, 한 주는 아이들과 한 주는 친정에서 라는 규칙을 정해 주말을 보낸 지 1년 이 다 되어가고 있다.


엄마의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있다


그간 아이들도 남편도 엄마 없이 주말을 보내는 요령이 생겼고, 용인에서 일산을 오가며 내 운전실력도 꽤 늘었다. 모두가 빠르게 적응하고 있지만 엄마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식사를 조금씩 다시 하기 시작하고, 조금 호전된 것 같다가도 한두 번씩 넘어져 2주 만에 가보면 팔에, 다리에, 머리에 곳곳에 못 보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아빠는 잠깐 조는 사이에, 잠깐 집안일하는 사이에 넘어져 저렇게 됐다며 한숨 섞인 한탄을 내뱉는다. 아마 분명 눈에 보이지 않는 뼈들도 성치 않을 터였다.


엄마와 함께 주말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고생했어"라고 말해주던 엄마의 목소리도 지금은 사라졌다. 소파에 누워 감은 눈을 뜨지 않는 엄마에게 "나 갈게. 또 올게"라는 내 목소리와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올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으로 유난히도 더웠지만, 그럼에도 엄마는 춥다며 에어컨을 끄게 했다. 침대 시트가 흥건히 젖을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긴 옷을 찾고 이불을 찾으셨다.


식사 거부도 더욱 심해졌다. 예전에는 서너 숟갈을 드셨는데, 지금은 한 숟갈 입에 대는 것조차 싫다고 거부하시니 아빠는 식사 시간마다 엄마와 씨름하다 보면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나있다고. 그제야 당신은 겨우 식은 밥을 먹기 시작한다고 푸념하신다.


더워서인 걸까, 아니면 기운이 없어 씹을 힘조차 없는 탓일까. 왜 때문인지 말도 않고 아이처럼 싫다고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돌려버리니 보는 사람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오늘은 할머니 집에 안 가면 안 되냐’ 던 둘째 아이를 떼어 놓고 왔던 날, 그날은 또 유난히 첫째 아이와 남은 방학 숙제를 가지고 씨름을 하느라 힘들었던 날이었다. 날도 덥고 힘드니, 집 근처 유명한 해장국집에서 고기가 듬뿍 담긴 해장국을 포장해 가져갔다.


하지만 엄마는 한 숟갈 만에 먹기를 거부했다. 2주 만에 마주한 엄마는 살이 더 빠졌는데 지난번 보다 더 야위었고, 목조차 제대로 가눌 힘이 없어 계속 떨어지는 고개, 눈꺼풀조차 들 힘이 없어 감은 눈으로도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그 고집은 어찌나 세었는지.


이 거 조금만, 아니 한 숟가락만, 아니 고기 한 점만...

아무리 더 먹자고 달래 보고 설득해 봐도 "X 년, XX 년, X 같은 년"이라며 숟가락을 들이밀며 버티고 선 내게 거침없이 욕을 내뱉었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보며 이제 자기 딸도 못 알아보고 욕을 하느냐며 분을 이기지 못해 엄마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난리를 치르고서도 저리 비키라며 내 팔을 꼬집고 주먹으로 내리치는 엄마를 보니 나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한 숟갈 먹고 배가 부른 거면, 엄마 스스로 벌떡 일어나서 걸어가. 아프다고 하지도 말고 도와달라고 하지도 말고. 엄마 스스로 다 혼자서 해. 이렇게 엄마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고집부릴 거라면, 차라리 요양원을 가! 거기선 이렇게 억지로 먹으라고 사정하고 매달리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나는 엄마 입에 고기 한 점을 억지로 욱여넣었고, 뱉으려는 엄마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기어코 엄마는 입에 있던 고기를 모두 뱉어냈다.


나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는 엄마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가 않은데, 이제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를 보러 오는 것도 힘들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럴수록 더욱 고립되고 외로워질 엄마 아빠가 너무 안쓰러웠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겠지, 배고파지시면 드시겠지 했지만 다음날 아침에도 똑같았다. 씹는 것이 힘드신가 싶어 환자식 음료를 권했지만 그마저도 병아리 모이만큼 먹고는 더 드시지 않았고, 내내 누워만 계셨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앉아서 온라인 예배라도 드리며, 가끔씩 엄마가 부르는 찬양을 들을 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앉아 계시는 것조차 힘들다며 눕기만 하셨고,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아픈 엄마가 죽도록 미웠다


덥고 힘들었던 그날 오후, 지친 우리는 시원한 콩국수와 냉면을 시켰다.

시원해서였나, 맛있어서였나, 씹고 넘기기가 쉬워서였나 아니면 배가 고프셨던 걸까 엄마는 콩국수 반그릇을 다 드셨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아빠는 얼음이 다 녹아버린 미지근한 냉면을 드셨다.


밖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넘쳐나는데, 배달 오는 동안 더위에 다 녹고 불어 터진 냉면 한 그릇을 꾸역꾸역 드시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상했다. 엄마만 아프지 않았어도 이 여름에 시원한 곳에 가서 다 같이 든든한 보양식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그게 너무 행복할 것 같았다.


여행도 가고 싶었다. 다 같이 그간의 걱정과 고민일랑 한국에 버려두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예쁜 것만 보고 몸도 마음도 씻어내고 싶었다.


왜 진작 안 아프실 때, 해외여행 한 번 보내드리지 못했을까. 돈 좀 벌고 나면, 애들이 좀 더 크면, 엄마 걷는 게 좀 나아지시면 가자고 기다리기만 하다가 결국 집 앞 식당조차도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남은 생을 집에서만, 병원에서만 보내시게 만들었을까 후회에 속이 상했다.


그런 내 마음이 무기력하고 공허한 엄마의 눈을 마주하니 아픈 엄마가 죽도록 미워졌다. 먹지 않는 엄마가, 나으려고 애쓰지 않는 엄마가 엄마의 고집으로 나와 아빠의 발목을 붙잡고 같이 물속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만 같아서 화도 났다.


죽음을 위한 결심


그날 속상한 마음을 가득 안고 집에 돌아오는 길. 시야를 가리려는 눈물을 이겨내려고 카플레이어의 데시벨을 높이 올렸다.


내 애창곡인 버터플라이를 틀어놓고 내질렀다.


“이 세상이 거칠게 막아서도

눈부신 사람아 난 너를 사랑해

이 세상이 볼 수 있게 날아 저 멀리 “


이도 저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나를 위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엄마를 위해

우울에 잠식되어 가는 아빠를 위해 외치는 말이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겠다고. 나의 가족들이 아픈 나를 돌보며 후회와 죄책감 속에서 생을 보내지 않도록 잘 죽을 준비 말이다.


내 은퇴 준비는 은퇴 후 잘 살기 위한 준비가 아닌 잘 죽기 위한 준비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련 없는 행복한 죽음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가는 여정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가망 없는 질병에는 생에 대한 미련을 두지 않겠노라고. 서서히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면, 내 두 발로 죽음을 준비하러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때 더 많이 좋은 추억을 만들고, 내 인지 능력이 떨어지기 전 생각하고 말할 수 있을 때 가족들과 더 많이 대화하고 사랑한다 말하겠다고.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아이들이 엄마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그 마지막은  병상에 누워 아프고 힘겨운 두려움에 떠는 목숨이 아닌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평안한 미소였다고 추억할 수 있도록.


적어도 의료장치에 내 코끝의 숨을 의지하며 버티지 않고 내 힘으로 숨 쉬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행복한 추억을 만들다가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힘을 길러야지. 그렇게 가족들 모두가 미안함도 죄책감도 없이 평안히 서로를 놓아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아빠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두 다리로 걸으실 수 있을 때 엄마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까지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아빠, 우울감과 무기력감에 젖은 아빠, 점점 말이 어눌해지는 아빠를 보며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마저 엄마처럼 무기력한 고통 속에 둘 수 없었다.


언젠가 다가 올 엄마의 마지막 역시 우리 가족 모두에게 힘겨웠던 기억으로 남지 않도록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슬프고 안타까운 심정과 간병으로 지친 마음으로 원망하다 맞이하는 죽음은 아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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