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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rishthismoment Jan 25. 2024

기억의 단편들

나의 울타리

어릴 적 아침에 눈을 뜨면 나를 기다리던 편지들. 다정한 엄마를 두어서 봄이면 봄이 왔다고, 여름이면 날이 더워졌다고, 가을이면 선선해졌다며 편지를 받았다. 나는 어린아이였음에도 그 순간들이 내 인생 가장 오래도록 기억할 따뜻할 순간임을 알았다. 참 다정한 엄마였고 시적인 엄마였다. 나의 눈을 보니 눈동자에 비친 꽃이 가득해 봄이 왔음을 알았다는 엄마의 편지는 어린 내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넘치게 행복한 선물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수가 커지고 셈이 복잡해지던 수학 시간, 이모에게 들어서 알았는지 사탕과 함께 챙겨주던 냉장고 속 엄마의 편지. 학교 다녀오면 간식으로 무엇을 해 놓았고, 환기 꼭 시키라는 엄마의 당부 말들. 예쁜 편지지나 카드에 적혀있기도 했지만, A4에 두꺼운 매직으로 쓰인 많은 날들의 편지들.




다정한 엄마와 함께 다정한 아빠도. 밭일 다녀와 힘들었을 텐데 꼭 저녁에는 목마나 등에 태워 한참을 놀아줬다. 그중에서도 제일 기억나는 건 어느 한 날 아빠와 찬우와 나 셋이서 함께 한 숨바꼭질. 넓은 집도 아닌 평범한 크기의 집에서 숨겠다고 이곳저곳 숨었던 우리와 아빠. 많은 숨바꼭질의 날들 중 그날이 기억나는 건, 아빠를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해 허둥대는 내가 귀여웠는지 웃던 엄마의 표정.



음악에 소질은 없었지만 거실에서 내가 피아노를 치면 엄마는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내게 보이며 틀린 부분을 부드럽게 말해주고는 했다. 솔- 미- 레- 와 같은 계이름으로 나를 지적하는데도 나는 그게 하나도 부끄럽지 않고, 그걸 알아차리는 엄마가 좋았다. 엄마의 재능을 반 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으련만.



종종 대중가요 악보집을 사 와서 연주해 주던 엄마. 그런 날이면 나와 찬우는 롤 빗을 한 손에 쥐고 옆에서 가수 마냥 노래를 불렀다. 음치라서 듣기 힘들었을 텐데 연주를 끝마치고 다시 앙코르 해준 엄마는 참사랑인가. 나 항상 그대를.



음에는 예민한 엄마 나의 노래를 자주 평가해주곤 했다. 대부분은 소리 내 웃으며, 어쩜 이런 음치가 태어났을까 했다. 거실 걸레질을 하며 송아지 노래를 부르던 날. 유일하게 음이 다 맞는 노래는 그 노래라면서 그 노래만 부르라는 엄마의 농담.



아빠의 차 소리가 멀리서 들리면, 앞다투어 먼저 안기겠다고 달려 나가던 동생과 나. 아빠다! 아빠야? 매일 그렇게 아빠를 기다리고 달려가 안기고.



기념일이면 딸이라고 꼭 나도 챙겨주던 아빠. 화이트 데이면 엄마에게 사탕을, 빼빼로 데이면 빼빼로를, 로즈데이에는 장미를. 고 옆에 나도 있으니 자그맣게라도 사탕 상자를, 빼빼로 한 아름을, 장미 한 송이를 받았다. 어릴 때 아빠 같은 다정한 사람을 만나는 게 꿈이었는데. 숱한 기념일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노란 장미꽃. 하필 엄마에게 노란 장미를 나에게 빨간 장미를 선물한 아빠. 노란 장미의 꽃말은 이별인데, 이혼하자는 뜻으로 알아도 되냐고 좋다고 웃었던 엄마.



엄마 아빠 일 기다리면서 찬우와 햇볕에 굽던 진흙 부침개. 적과하고 떨어진 사과 열매들 사다리에 갈기. 양손 가득 무겁게 사과 들고 엄마 아빠 일 도와주기. 고사리 같던 동생 손 꼭 쥐고 다니기.



주말 아침이면 각자의 이불이 집이 되어 띵동 띵똥 문 열어달라고 애원하고, 문 열어주면 한 이불속으로 들어와 뭐 가 그렇게 재밌는지 껄껄 웃으면 아침을 시작하고는 했던 동생과 나.



내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엄마의 습관들. 옆자리 모르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음식. 따뜻한 인사. 애정 어린 시선. 책의 맨 앞장 날짜와 그날의 기록. 어른들에게 양보하는 자리. 혼자서도 부지런하던 삶. 여유 있는 걸음들.


부단히 노력해도 따라잡을  없는 엄마의 다정함. 그리고 엄마가 내게 주는 사랑.  잘해야지 마음먹어도 쉽지 않은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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