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 자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씨방 Apr 18. 2021

좋아하는 자리

#날씨

아침에 일어나면 베란다로 향한다.

가장 먼저 그날의 날씨를 살핀다. 동해시에 와서 생긴 습관이다. 나는 베란다에 있는 걸 좋아한다. 베란다에는 커다란 창과 바 테이블이 있다. 창에 바다가 담긴다. 날이 맑을수록 하늘과 수평선의 경계가 뚜렷하다. 간혹 아래쪽 공터에서 비닐봉지를 든 채 무언가 채집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베란다에는 차양막이 없어서 빛이 그대로 들어온다. 머리를 감고 앉아 있으면 금세 마른다. 돌이켜 보니 드라이기를 꺼내 쓴 적이 없다.


베란다 바 테이블에 앉아 책을 펼친다.

노트북을 펼치면 화면이 빛으로 깜깜해진다. 덕분에 키보드보다 손글씨를 더 많이 쓴다. 일기장을 펼쳐서 그날의 날씨와 기분을 적는다. 기분에도 온도계가 있는 것처럼, 날씨와 함께 기분이 고조됐다가 가라앉는다. 지난 일기는 '무엇을 하겠다'와 '결국 하지 못했다'가 반복되곤 했다. 크고 작은 고민도 날씨 앞에선 사소해지는 게 좋다. 시를 필사하기도 한다. 한 줄 한 줄 빛이 와 닿는다. 두 편 정도를 옮기고 나면 오른 손등이 따뜻해진다. 책을 덮고 베란다를 나온다.


공간에 내가 길들여지듯, 나도 공간을 길들인다.

베란다는 침실과 연결돼 있다. 그리고 베란다 문 앞에는 화장대가 놓여 있다. 나는 화장대에 놓인 마른 꽃잎과 상자들을 베란다에 모두 옮겼다. 언제든 내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빛이 따가운 날엔 한 걸음 물러나, 침실 화장대에서 책을 펼친다. 노트북을 켜기도 한다. 살며시 빛이 드는 화장대 자리를 좋아한다. 의자에 두 다리를 올리고 앉아 있는 시간이 편안하다. 베란다 바 테이블 위의 조형물도 바닥에 내려놓았는데, 자리를 넓힌 덕분에 노트북을 두기 딱 좋은 크기가 됐다. 저녁에는 이곳에서 노트북을 펼친다.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선선한 이곳을 좋아한다.

나는 늘 침실 문을 열어둔다. 주방과 침실, 베란다가 일직선으로 연결돼 있어 주방에서도 베란다 창을 볼 수 있다. 주방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좋아한다. 몇 걸음 멀어졌다는 이유로 다르게 보인다. 공터와 낮은 건물은 가려지고 바다와 하늘이 가득하다. 찌개를 끓이다가 오른편을 바라보면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 자리한다. 이곳에 서서 음식을 만드는 일이 지루하지 않다. 한 자리를 좋아하게 되면 다른 자리에도 마음이 간다. 베란다와 화장대, 주방까지. 구석구석 좋아하는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좋아하는 자리에서 하는 일들을 좋아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금자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