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졔졔 Jan 01. 2022

새해 복 많이 나누세요

2022.01.01

올해가 되면서 딱 한 가지 목표만 세웠다. 죽을 쑤던 밥을 쑤던 매일 글을 쓰기로. 그것 외에는 바뀐 것이 없다. 아, 작년에 펀딩 해둔 일력을 오늘부터 개시할 수 있다는 것도 바뀌었다. 그렇지만 뭐? 어젯밤에 자고 일어난 집에서 눈을 떴고 여느 토요일과 다르지 않게 조금 늦잠을 잤다. 이제는 2년 전이 되어버린 2019년 여름 쏟아져 내린 비로 천장 벽지에 남은 물 샜던 흔적도 그대로이다. 누운 채로 눈을 두세 번 더 깜박여 천장을 본다. 물 샌 자국이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뱅크샐러드를 열어 자산 현황을 확인한다. 밤 새 조금 내려앉은 미국 주식 값 외에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것도 아니다. 어제 도착한 그 많은 새해 복 인사는 별 효력이 없다.


근데도 온 세상이 복 받으라는 인사로 가득했다. 알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치는 거짓말인가? 하루 종일 집 밖으론 한 걸음도 떼지 않았지만 부산스러운 하루였다. 단톡들이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복많' '새해복'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의 의미 없는 변주가 줄줄이 이어졌다.


어쨌든 다들 엿 먹으라고 나쁜 마음으로 하는 말은 아닌 줄 아니까 모두의 희망찬 새해 초부터 찬 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으니 입을 닫았다. 답장 삼아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을 서너 번 하다가 이내 관두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이 어딘지 이상하고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이건 내 언어가 아니다.


사실은 사나흘 전부터 올해에는 누구보다도 새해 복 인사를 열심히 하면서 2022년을 맞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불러줘야 먹고사는데, 이유 없이 연락하면 이상하니 연말 연초를 핑계 삼아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새해 인사로 상기시키면 좋겠군.'과 같은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였다.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같이 계산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냥 천성이 다정하거나 주변인을 잘 챙겨서 (혹은 실은 정말 계산적이고 실행력까지 갖춰서) 매년 명절 인사를 여기저기 다 돌리고는 하는데, 그게 뭔가 평판 자산이나 자산에 실제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확인했다. 그냥 확인한 게 아니라 내심 부러워하며 지켜봤기 때문에 올해는 좀 나도 그런 걸 해볼까 싶었다. 


그리고 맞은 어제, 오늘, 시작도 안 하고 관뒀다. 아무리 생각해도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챙겨서 인사하는 건 내 영역이 아니기도 하고 '새해 복'류의 인사는 내게 정말 징그럽다.


다들 기쁨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중에, 가볍고 즐겁게 한 인사에 죽자고 달려드는 소시오패스가 되고 싶진 않다. 억지로 뭔가 다른 '갬성'을 가졌다던가 튀고 싶어서 괜한 어깃장을 놓는 사람이나 위선자처럼 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이런 감상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는 진짜 내 타입이 아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 새해 복에서 중추 역할을 담당하는 '복'에 대한 정의가 석연치 않다. 모두가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 복. 복이 뭘까. 혹시 내게 받으라는 복이 그런 건가? 모두가 벼락부자나 건물주가 되길 바라는 세상에서 큰돈을 손에 쥐는 것을 말하는 건가? 날씬한 몸매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승진? 입시 합격? 각자가 원하는 복의 모양도 모르고,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복이라는 말로 퉁치는 인사치레는 싫다. 복 많이 받으라는 복붙한 말들보다 어떤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는지를 다정히 묻고 같이 대화하며 사랑하는 이들을 응원하는 시간들이 더 간절하다.


둘, 그리고 모두에게 같은 단어의 형태로 배달되는 '복'이라니. 만약에 복이 돈이나, 몸매나, 승진이나, 합격이나 뭐 그런 거라면 모두가 복을 받는다는 게 가능한가? 누군가의 손실을 딛지 않고 버는 돈이나, 칼로리 커팅 없이 이룰 수 있는 몸매나, 경쟁자 없는 승진이나 합격이라는 게 가능한가? 아니 다들 '브루스 올마이티' 안 본거야? 모두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면 좋겠다만 늘 행복한 일만 있을 수 없는데. 늘 복만 오는 것은 아닌데. 주변에서 받으라고 받으라고 응원해줘도 잘 오지 않는 복보다도, 늘 나는 부른 적도 없는데 매년 찾아오고 새해에도 예기치 못하게 찾아 올 여러 비보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함께 하겠다는 무언의 응원들이 내겐 더 필요하다.


셋, 갑자기 '새해에' 복 받으라는 것도 조금 어리둥절하다. 지난 세월들에 내게 주어졌던 감사의 이유들이 여전히 내 손에 있는데, 그것들이 채 가시지도 않기 전에 새로운 복을 찾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너무 욕심인 것만 같다. 나는 가진 복들을 더 찾아내고 세어보며 살고 싶다. 게다가 지금은 기후위기로 세계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누려온 모든 복들을 복으로 여기지 못하다 이 모든 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복을 가장한 채 지구 생명들의 종말을 이끄는 사사로운 복보다도 있는 줄도 모르고 모두에게 주어졌던 복을 세보는 고요한 시간이 우리 모두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믿기에,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진 복을 세어 보는 충만한 시간들이 더 가득하길 바라본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끼리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하는 와중에, 미처 새해 복 인사가 닿지 않거나 새해 복을 빌 수 없는 상황의 생명들이 떠올라 가진 것 많은 우리끼리 벌이는 잔치 같은 새해 복 인사가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다. 추운 날씨 단칸방에서 홀로 마른기침을 하고 있을 오래된 육신들이나,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연고 없는 지역에 다 같이 모여 지낼 수밖에 없을 사람들이나, 안티 백서가 판 치는 선진국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열악한 병상에서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을 저 먼 나라의 아픈 몸들이나, 어제 결국 본회의에 올라오지 않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긴 시간 기다렸을 이들이나, 집으로 돌아오길에 눈이 마주치고는 얼른 자리를 떠버리는 구내염을 앓고 있는 게 분명한 동네 고양이와 같은 생명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뭐 말이야 길었지만 결국 나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가 내 타입이 아니라는 개인적인 소감을 구구절절 늘어놓은 것이다. 정초부터 희망찬 새해를 말하기보다 모난 시선으로 삐뚤게 구는 내가 나도 가끔 싫지만 천장의 물 샌 자국이 계속되는 현실이듯이 올해도 나는 이렇게 살 것 같다. 그리고 남들도 살던 대로 살겠지. 그러니 한 달 뒤에 돌아올 음력 신년에 또 한 바탕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소란이 벌어지고 나는 여전히 속으로 잔뜩 찡그리겠지만, 누군가 이 글을 보고 조금이나마 공감해준다면 이 말로 인사를 대신해주면 좋겠다.


'새해 복 많이 나누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해가 바뀌는 게 나는 사실 별 감흥이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