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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진 Jan 06. 2019

내 세상의 끝에서 만난 새로운 시작

이제 더 이상 떠남이 두렵지 않은 여행자가 보내는 네 번째 러브레터

@구시가지광장, 체코 프라하


알고 보면 프라하 '팁 투어' 홍보 글입니다

최근 여행사를 끼지 않고 직접 일정을 짜는 자유 여행자가 늘며 현지에서 진행되는 원 데이 투어가 인기입니다. 특히 유럽은 수많은 정복의 역사를 가진 곳이기에 도시 곳곳에 다양한 사연이 얽혀있죠. 사전 배경지식 없이 무턱대고 여행을 떠난다면, 건물 하나, 길모퉁이 하나에 숨겨진 도시의 매력을 보지 못할 겁니다. 인생 첫 번째 유럽여행이라며 들떠있는 저에게 지인들이 가장 강조한 점도 이거였어요. 관광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해설해주는 현지 가이드의 원 데이 투어를 들을 것!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현지 교민들이 모여 진행한다는 프라하 '팁 투어'와 수많은 현지 여행사 상품이 뜹니다. 처음 들어보는 '팁 투어'라는 개념에 눈이 번쩍 뜨였죠. 프라하 팁 투어는 사전 예약이나 비용 지불 없이 정해진 시간과 위치에 자유롭게 모여 진행되는 가이드 투어입니다. 투어를 마친 후 본인이 내고 싶은 만큼의 '팁'을 가이드에게 지급하는 말 그대로의 팁 투어죠. 사실 블로그에는 긍정적인 후기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가이드 하나에 많은 인원이 우르르 붙으니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는 평부터 모든 투어 종료 후 비용을 지불하는 시스템이라 돈을 내지 않으려 투어 중간에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도요. 


부정적 평가를 보면서도 왜인지 꼭 한번 듣고 싶어졌습니다. 현지 교민들이 고국에서 오는 여행객들에게 자신들이 사는 도시가 얼마나 멋진 곳인지 알려주고 싶어 가이드 조직을 꾸렸다니, 감동적이잖아요? 저는 결국 사설 가이드 투어로만 두 개를 끊자는 동행 언니의 제안을 거절하고 구시가지는 '팁 투어'를 들었습니다. 직접 들어보니 어땠냐고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돈을 두 배로 내더라도 들을만한 투어였습니다.


경상도 아가씨의 걸쭉한 해설

집결지에서 가이드 언니(언니가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편의를 위해 이렇게 부르기로 해요)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생각했죠. 아, 망했다. 애교 있는 경상도 사투리에 무언가 모를 외국 억양이 섞여 알아듣기 어려웠거든요.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저의 발을 묶은 건 그다음 관광지인 '화약탑'에서였습니다. 화약탑(한양 수도로 들어오는 우리나라의 4대 문과 같은 역할) 소개를 마친 그녀는 우리에게 왼쪽 벽도 보고 갈 것을 제안했죠. 그곳에는 칠흑같이 새까만 벽 색과 대비되는 하얀색 분필로 누군가의 한글 이름이 커다랗게 쓰여있었습니다. 낙서를 보며 가이드 언니는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모두가 이런 행동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사실 한국에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었는데, 해외에 나와 살다 보니 애국자가 되더라고요.

가이드가 된 지금도 고국에 대한 한치의 부끄러움 없고자 열심히 살고 있어요. 

우리 모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이 됩시다."


어느 반나절 짜리 투어에서 이런 말을 하나요. 직업정신과 사명감이 투철한 가이드 언니의 모습에 살짝 감동했습니다. 인터넷 강의까지 들으며 공부한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증명하듯 역사 바보인 저도 쉽게 이해할만큼 체코의 역사를 잘 설명해줬고요. 예를 들어 '까를 대학'의 경우, 조선 최고의 성왕이었던 '세종대왕'처럼 국민들을 굽어살핀 '까를 4세'가 '집현전'처럼 교육 수준 및 나라 발전을 위해 지은 전문 교육기관이라 설명합니다. 아무튼 가이드 언니 덕분에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 대해 알차게 공부했고 종결지인 '구시가지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누군가의 1주년을 기념하며 온전히 끝을 맺다

교과서에서나 만나 본 종교 개혁의 아버지 '마틴 루터 킹'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다는 얀 후스의 동상을 마지막으로 이날의 팁 투어가 마무리됐습니다. 다들 팁을 내려 가방을 뒤지고 있는데 가이드 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어요.


"오늘은 제가 팁 투어를 시작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에요.

1년 전 오늘 너무 긴장된 상태라 말도 더듬고 배고픈 지도 몰랐는데, 이제는 많이 적응해서 배고프네요.

제 팁 투어의 생일날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는데 저는 왈칵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고는 하늘만 쳐다봤습니다. 저는 지쳤다는 핑계로 자신의 삶을 견디지 못해 그곳에서 도망쳤는데 낯선 프라하 땅에서 벌써 일 년이나 일 해왔다니. 말도 못 하게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녀의 일 주년, 그리고 이어질 새로운 시작을 바라보며 저 또한 이 서사를 온전히 끝맺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이었죠.


눈물을 꾹 참고 팁을 건넨 후 동행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던 길. 눈물이 뚝 뚝 흘렀어요. 그리고 그 눈물이 다 말라갈 때쯤 몹시 개운해졌습니다. 마음 한쪽에 아직 묵혀뒀던 답답함이 다 쏟아져 나왔나 봅니다. 덕분에 한결 개운하게 '도망자'가 아닌 '여행자'로 이후 여행을 즐길 수 있었어요.


이처럼 저는 제 세상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마주했습니다.

이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제 인생 챕터 2의 시작을 꿈꾸게 되겠지요.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도 기나긴 고민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마주하길 바라며,  

이제는 더 이상 시작이 두렵지 않은 프로시작러 김수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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