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에서 온 편지
이유는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나의 장례미사는 꼭 어린이 성가대의 노래로 마쳐지길 바랐다. 어린 낭만이랄까. 오늘 소개할 밀라노 기념 공원묘지 Cimitero Moumentale는 좀 멀더라도 걸어서 가보고 싶었어. 한 시간 남짓.
예쁜 어린이 예린아. 나의 장례미사는 말이야. 생각해 보니 그러면 안 될 거 같아. 왜냐면 그보다 아름다운 미사가 또 없겠지만,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성가대 꼬마들이 악몽이라도 꾸면 안 되니까. 포기다! 포기. 한 번도 죽어 본 일이 없으면서 매번 죽음을 곁에 두는 걸 보면, 적어도 우리는 그 너머의 시간을 의식하며 살아가나 봐.
가끔 늦은 시간까지 작업을 하다 보면, 지름길로 밀라노 공동묘지를 지나야 할 때가 있단다. 근데 그럴 때가 있잖니. 갑자기 뒷목이 서늘한 게 이런 생각이 들어. ‘여기에 귀신이 나타난다면, 한국 귀신일까? 밀라노 귀신일까?’ 언어 선생님 그라찌엘라 씨에게 물어보니, 밀라노에서는 귀신보다 ‘악마’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고 하더라. 악마는 꼭 무덤에 사는 것은 아니어서 여기 사람들은 공동묘지를 무서워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고. 사실 나도 귀신이 무섭지는 않아 그보다 무서운 건,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새벽 4시쯤 걸려온 전화는 외삼촌의 죽음을 알렸으니까. 그 후로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은 갑작스러운 인간 존재의 ‘사라짐’을 알리는 거 같아 아직도 망설여진다.
밀라노 기념 공원묘지는 시내 가까이에 있단다. 도시 속에 죽음을 기억하는 이곳은 까를로 마챠끼니 Carlo Maciachini가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여 1887년에 완성한 공원묘지로, 멀리서 보면 대성당을 떠올릴 정도로 아름다운 입구가 보인다. 귀신이 아니라 귀족이 살아도 될 정도로. 여기는 특히 공원묘지 안쪽에 이탈리아 최초의 근대식 화장장이 세워졌어. 가톨릭 교리에 적대적이었던 박해자들은 ‘육신의 부활’을 막기 위하여 순교자들의 시신을 태우려고 했었지. 그래서 ‘화장’이라는 문화는 당시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는 육신의 부활 교리를 부정하지 않는 한에서 허용한단다.
‘죽은 자의 도시’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이곳을 걷다 보면 어둡고 불안한 미래가 떠오르기보다는 젊은 연인들이 조용히 산책을 하고, 떠나간 가족들을 기억하는 따뜻한 장소로 느껴져. 무엇보다 유명한 건축가들이 만든 오래된 조각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런지, 죽음 후에 정지된 그들의 시간이, 묘지 곳곳에서 떨어지는 급수대의 물소리와 더불어 묘한 생기를 전한다.
예린아. 우리는 묘비에 쓸 문장을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지 몰라. 무엇을 영원히 남길까. 여기 수많은 무덤 중에서 기억에 남는 묘비가 하나 있더라. 딱 한 단어로 된 묘비명은,
Perché 페르케( 왜? 또는 왜냐면을 뜻하는 이태리어)
죽은 이의 유언인지 조각가의 의도인지는 몰라도 ‘타인의 죽음’만을 볼 수 있는 우리에게, 죽음은 끊임없이 본질을 묻고 있으니까. Perché...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Perché... 친구들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이 없던 내가, 죄를 배우지 못한 꼬마들의 무덤 앞에서는 참 어쩌질 못한다. 까닭 없는 사라짐.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너는 아니?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늘어가는 죽은 이들의 이름과 기도들 앞에서 모든 것이 허무하게 다가오는 마음을. 어른들은 세상의 문제들을 매일 이야기하지만 모두 풀 수 있는 건 아닌가 봐. 궁금한 건, 화장이냐 매장이냐의 장례 문화 차이가 아니라 ‘죽음 후에는 정말 모든 것이 끝내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라는 문제야. 그게 맞다면, 세상이 말하는 대로 오늘만 실컷 즐기면 되겠네.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들은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단다.(루카 24:13∽35) 복음의 기쁨을 알게 된 제자들은 스승을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빵을 드실 때 그 순간 예수님은 사라져 버리시지.
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복음사가 루카는 예수님의 ‘사라짐’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어 ἄφαντος 아판토이 라는 단어를 이 부분에서만 사용하고 있어. 오늘날 풀이해 보면, 단순히 유령처럼 제자들 앞에서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상태 즉, ‘부재하는 현존’을 표현하고자 했단다. 어쩌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부활할 때, 인간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한계 너머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보여 주려 하신 건 아닐까.
차분히 내리는 오전의 깊은 고요가 묘지에 가득할 때쯤, 담을 타고 울리는 열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난하고 오래된 무덤 하나를 찾아 사랑의 시 한 편을 읽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