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동남부 12구.
센강변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베르시.
와인 저장고였던 베르시 빌라주에서의 아이쇼핑을 하던 날이었다.
100M 정도 되는 작은 길에 오순도순 모여 있는 노천 카페와 식당들,
그리고 참 야무지게도 내 눈을 사로잡은 예쁜 물건과 소품들이 가득했다.
화장품 매장의 훤칠한 남자 직원은 5유로를 구입하고 50유로를 내밀었던 우리에게
작은 농담을 건넸고 우리의 장난스러운 애교에 문제없다며 향수까지 칙칙- 뿌려주던 센스.
"저 남자 참 멋지지 않니?"
"그런데 반지를 꼈더라고요. 그것도 네 번째 손가락에!"
왜인지 소녀처럼 아쉬워했던 우리들.
광장 계단에 앉아 비보이들의 춤을 감상하고, 스케이트 묘기에 신나 있기도 했던 시간들.
참 평화로운 곳이었다.
조용하고 따뜻하고, 적당히 시끌벅적했던, 어느 주말에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보통의 날이었다.
그곳에서 조금은 아슬아슬해 보이는 긴 나무다리를 건너오면 영화관과 미테랑 도서관
그리고 그 안의 작은 카페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그중 한 카페에 들어가 성실히 일하는 인상 좋은 흑인 청년에게 주문을 하고
파리의 지붕들이 펼쳐진 노천카페로 나와 앉았다.
3월, 바람은 좀 거셌지만 우리가 주문한 샌드위치는 정말 꿀맛 같았고
우리가 지나온 삶과, 스쳐온 사랑들에 대해 늘어놓았던 주말 오후.
햇빛이 비추면 흡수하고 구름이 하늘을 가리면 받아들이고
비가 오면 그대로 맞았던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로운 주말 오후였다.
어떤 해에 다시 찾아갔던 이곳에서는 미테랑 도서관의 나무 계단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하염없이 센강을 바로보곤 했다.
눈 앞에 흐르던 센강의 풍경과 귓가에 흐르던 음악소리들,
수채화처럼 움직이던 사람들, 늦은 오후 해가 저물아가는 풍경들,
너무도 완벽한 그때의 오후가 가끔 생각난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 붉게 물든 저녁의 시작 무렵, 앉아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까지 가는 버스가 지나는 길들을 따라 무작정 걷기도 했다.
광야를 걷는듯한 적당한 고독함이었고 이방인의 적절한 외로움이었다.
때론 여행은 빼곡히 적힌 플랜 A보다 플랜 B나 플랜 C가 가슴에 더욱 파고들 때가 있다.
그날 파리 동남구 12구에서 우리가 나눴던 사소한 이야기들,
내 눈에 담았던 풍경들, 내 발로 꾹꾹 밟으며 걸었던 시간들이 그랬다.
흐르는 대로 두어도 괜찮다.
조금은 느슨해져도 괜찮다.
여행이란 그런 거니까.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는 결국 방향을 잡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