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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Jul 24. 2019

상사와의 면담이 남긴 것

저는 실력 지상주의입니다

그동안 내가 일했던 환경은 나 하나가 실수하면 100여 명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곳이었다.

나 혼자 혼나고 자책해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녹화가 딜레이 되면 그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돈도 함께 피해를 받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혹독한 훈련, 즉 실력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훈련에 익숙해져서 실수가 줄어들면 후배가 들어와 실수를 했다. 

후배는 후배이기 때문에 당연히 실수를 안 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후배가 실수를 했을 때 내가 수습할 수 있는 선까지 

그 후배를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했다. 후배의 실수도 내 실수이기 때문에.


상사와의 면담을 하던 날 상사는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작가님은 수준 높게 일을 하고 정확하게 일을 하는 건 좋은데 너무 쎄다고.

다른 직원이 실수를 하면 좀 부드럽게 말해줄 수 없냐고 말이다. 

정말 올해 들어 이 상사에게서만 몇 번이나 어이가 없는 건지 헛웃음이 나왔다.


열 번을 똑같은 실수를 지적했는데도 고치지 않는 사람이 문제인 걸까,

열 번을 똑같은 실수를 지적했는데도 고치지 않는 사람 때문에 화가 난 사람이 문제인 걸까?

이 상하 뿐 아니라 인사팀까지 나의 말투를 지적하니 이제는 내가 성격 파탄자가 된 것만 같다.


나는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은 '실력'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으나 일반 사무직처럼 일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재능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실력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더구나 상사의 말처럼 '전문가'라고 말하고 싶다면 말이다.


그러나 상사는 '실력'보다 팀 분위기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을 바꿔주기를 바랬다. '실력'보다 '팀 분위기'로. 


자,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우리 팀 분위기가 안 좋냐면 절대 아니다. 

일하다 보면 혼나고, 혼내고 그러다 또 깔깔 한번 웃고 그러면서 일하는 거지,

어떻게 매시간 매 순간 하하호호 웃으며 일할수가 있냔 말이다.

우리 팀은 딱 그렇게 일한다. 딱히 분위기 나쁜 상태로 일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사는 모르겠지만 그 상사가 없을 때 우리는 더 화기애애하다. 


더구나 내가 쎄게 말해서 분위기가 안 좋다니? 오죽했으면 그랬을까라는 생각은 안 드는걸까?

신입이라고 언제까지 봐줘야 하는 걸까. 나는 이미 몇개월을 기다려주고 가르쳐줬는데.


나는 상사에게 선언 했다.

퀄리티를 개선해보고자 내가 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하고 

나의 노하우를 전수했던 건데, 따라와 주지 않는 사람들 붙잡고 

계속 이끌어갈 생각이 없으니 나는 이제 '포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상사는 왜 '포기'라는 말을 쓰냐, 다른 단어를 쓰면 안 되냐고 나를 설득했다.

정말 피곤했다. 원래 면담이란 이런 건가.

그래도 나는 굴하지 않고 강력하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포기입니다"


사람은 모두 다른데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순 없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면 '아 그냥 나와 생각이 다르구나'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지 

이 상사는 꼭 자신의 생각대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고 한다. 

나는 청개구리라 그럴수록 더 반발이 생기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리고 내가 피드백을 주는 게 왜 팀 분위기를 망치는 일인지 모르겠다.

회사란, 조직이란 팀 분위기만 좋다면 실력 없는 사람도 월급을 주며 끌고 가는 곳인가?

우리 팀의 팀 분위기를 망치고 있는 사람이 진짜 누구인지 그 상사는 알기는 아는걸까?


물론 신입이니 일에 대한 능률이 떨어질 수는 있으나 창작물을 만드는 일은 

자신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임하느냐에 따라 실력도 결과물도 달라진다.

회사는 학원이나 학교가 아니므로 배우는 입장에서 수동적으로 일하기보다는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사 역시 그런 사람을 감싸고 돌게 아니라 붙잡아놓고 가르치던, 혼내서라도 가르치던, 

책임을 져야 하는데 나와의 면담에서 결론은 자기는 이 업무보다 다른 업무가 우선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기만 했다.

그럼 그 신입은 누구에게 배운단 말인가? 내가 가르치는 건 '팀 분위기'를 망쳐서 싫다며?


뜻을 굽히지 않는 나에게 상사는 조직생활이란 그런 거라며 마치 내가 조직생활을 못해봐서 

'너는 모르겠지만 조직생활은 이런거야~' 라는 말투로 나를 가르치려 들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비록 프리랜서였지만 여기보다 덜한 환경에서 조직생활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력이 없으면 하루아침에도 잘릴 수도 있는 목숨을 가지고 일했는데

실력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도 잘리지 않는 회사보다 힘들지 않는 조직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내가 이 바닥에서 10년 넘게 일해봤는데~"를 강조하는 그렇고 그런 대화가 이어졌다.


저기 , 상사님.

좋은의미 나쁜의미 다 포함해 세상 상또라이들이 모두 모여있는 방송판에서 

10년 가까이 파리 목숨으로 버텨온 건 쉬웠을까요?


그리고 말입니다. 저에게 말한 경력에 비해 지금 제가 보고 느낀 것들은 너무나 처참한데요.

'경력'만 가지고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돈 받고 일하는 '프로' 혹은 '전문가'에게는요.


결국 그 상사는 실력은 좋으나 나의 그런 '태도'가 문제라고 인사 평가서를 작성했고 

덕분에 나는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다시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됐다. 

원래 프리랜서 인생이라 정규직에 대한 로망도 없도 정규직 전환이 되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그 상사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사적인 감정을 섞은 

조금은 치사한 일을 벌였다는 것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래서 회사원들이 더럽고 치사해도 다 참고 네네 하는구나.

이렇게 깨닳게 된다. 이렇게 회사원이 된다.


상사와의 면담은 그렇게 또 한 번 더러운 기분을 남겼다. 

벽을 보고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콘크리트 벽이 차라리 내 말을 더 잘 들어줄 것 같았다.

물론 내가 모두 잘 했다는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나를 보호하고 내 편을 들어줄 의무가 있다.

적어도 나는 이 회사에서 일때문에 피해를 주진 않았으니까.


나는 '실력지상주의자'다. 

 '실력'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나의 가치관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성격이 아니라 나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다. 

나는 '프로'이고 싶으니까.


PS - 그런데 왜 상사만 아랫직원을 평가해야 하나? 무슨 기준으로?

        아랫직원도 상사를 평가해야 합리적이고 평등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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