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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Jul 30. 2019

여직원의 자세

내가 여자인 직원으로서 느낀 점들

1.

내가 두 번째로 서울에 와서 일했던 곳은 충무로의 한 카메라 샵이었다. 

나는 사진 전공자였기 때문에 포토샵을 할 수 있어서 그곳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때는 너무 당연하게도 커피를 타거나 청소를 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나만 하냐고 한마디도 못했나 싶은데 그 당시에는 그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2000년대였는데도 말이다.

미디어에서도 커피는 당연히 여자 직원이 타고 청소도 설거지도 당연히 여자 직원이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곳에서 일할 때 (본인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나는 종종 나를 다방여자 취급하는 

사장과 그의 친구들의 행태가 잊혀지지 않는다.

가령 지인이나 친구들이 오면 당연하게 커피 좀 타오라고 한다던가 

내가 스커트를 입고 가면 내 몸매를 훑어본다던가 하는... 

그 스커트는 내 몸매 훑어보라고 입은 게 아닌데 말이다.

어쨌든 그 사장의 조카가 나를 스토킹 및 협박을 해서 그 카메라 샵을 나오게 됐다.     


내가 종종 지금의 상사에게서 이런 걸 느낄 때가 있다.

여자 직원이니까 사무실 분위기를 밝게 해 줬으면 좋겠다는 것.

그러니까 자기가 외근을 다녀오면 다녀오셨냐, 밥은 드셨냐 챙겨주고 사무실 환경에도 신경 좀 써주면서

(가령 설거지나 간단한 청소나 정리 같은 것) 챙겨주기를 원하는 것 같을 때가 몇 번 있었다. 

이건 나의 명백한 오해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명백히 그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청소나 정리에 큰 인연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왜 내가 해야 하나? 

각자 자리 정돈은 각자 하고 본인이 만든 쓰레기는 본인이 치우면 될 것을.     


2.

어느 날 상사가 외근을 다녀왔다. 나는 오셨냐고 하고 내 일에 몰두했다.

그랬더니 상사는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나 밥도 안 먹었어~”라고 하는 거다.

나는 의아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리고 생각만 해야 했던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어 버렸다.   

  

“제가 드시지 말라고 한 적 없는데요...” 

    

사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먹지 말라고 한 적도 없었고 내가 점심시간 껴서 외근 다녀오라고 한 적도 없었다.

점심시간이 지났으면 자신이 알아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면 될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의문이다. 도대체 나한테 어떤 말이 듣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 거지?


아마도 “그러셨냐, 배고프시겠다, 얼른 식사하셔라” 이런 살가운 멘트들을 원했던 것 같은데 

내가 그런 멘트를 ‘상사에게’ ‘살갑게’ 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상사의 노고를 무시한 것도 아닌데 

높고 밝은 톤으로 얘기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한다.     


친구는 내가 여자 직원이라서 그 상사가 나에게 오피스 와이프 같은 관계를 원했던 것 아니냐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면 택도 없는 소리니 그런 생각은 단 0.1초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방송을 할 때는 작가 구성원이 모두 여자였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선배 언니들한테 살갑게 굴고 애교도 부려서 나름 이쁨도 받았었다. 

먼저 밥을 챙겨주기도 하고 먼저 커피를 사드리기도 했다. 

개인적인 일에도 깊은 공감을 하고 사적인 술자리를 자주 갖은적도 많다.


하지만 내가 이 회사에서 그러지 않는 이유가 있다.

우리 회사는 층마다 부서가 다르고 그중 우리 사무실에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남자다.

아주 단순하게 괜히 말 나올 행동을 하고 싶지 않다. 


3.

나는 몇 년 간 살사 동호회에서 활동했다. 동호회 스텝까지 할 만큼 꽤 열심히 했었다.

대부분의 살사 클럽이 쉬는 월요일을 빼고 매일 살사를 추러 갔었으니까.

실력을 높이기 위해 고수들에게 먼저 춤을 신청하거나 선생님들에게(타 동호회 선생님들에게도)

먼저 춤을 신청해서 추고 감을 익히곤 했다. 나는 살사를 정말 잘 추고 싶었다.

     

남자 회원들하고도 격 없이 지내다 보니 한 달에 한두 명씩은 꼭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런 나를 몇 명의 여자들은 시기(?)와 질투(?)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남자 회원들과 웃으면 인사를 하거나 웃으며 대화만 해도     

“쟤 또 꼬리 친다”던가, “쟤 남자 킬러잖아”라던가 하는 말이 나에게 들려왔다.

대놓고 "너 선생님들하고만 춤춘다고 선생님들 킬러라는 소문도 있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결국 그 동호회를 나오게 된 건, 그런 격이 없던 나에게 너무 편안함을 느꼈던 건지 

동호회 회장이 나와 춤을 추다가 나의 엉덩이를 만져서였다. 

춤 동작의 오류로 일어난 일이 아닌 명백한 성추행이었다.

그런 나에게 스텝들은 그냥 넘어가라거나, 둘이 알아서 해결하라거나, 소문나지 않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 동호회를 나왔다.     


사실 이 동회회뿐만 아니라 어느 모임에 가도 늘 나에게 저란 말들이 따라왔다.

정말 스트레스였다.

도대체 나보다 훨씬 예쁘고 멋있고 능력있는 여자들이 왜 그런 이유로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묻고 싶네 정말.     


그 이후로 나는 어떤 트라우마 같은 게 생겼다.

그래서 오히려 남자에게 더 쌀쌀맞게 대하게 됐다.  

   

4.

무엇보다 내가 이 회사에서 무뚝뚝함과 쌀쌀맞음 그 자체로 행동하는 데는 상사의 역할도 컸다.

내 옆자리에 앉은 남자 직원은 상사 피셜 이 회사에서 가장 잘생겼다는 사람인데 

(단호하게 말하지만 나에겐 아니다)

그 사람과 내가 퇴근시간이 같은 데다가 같은 지하철역으로 가기 때문에

입사 초반에 함께 퇴근해서 같이 가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상사가 “왜 매일 둘이 같이 가?”라는 말을 했다.

그냥 그 직원과 나는 웃음으로 때우고 퇴근을 했지만 가는 내내 찝찝해지면서

위에 언급한 예전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띄워졌다.     


‘같이 가면 안 되는 거였나?’     


굳이 같이 안 갈 이유도 없고 같이 일하는 팀이니까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순간 내가 잘못했던 건가 싶었다.

그걸 나만 느낀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그 직원은 나보다 5분 정도 늦게 퇴근했다.    

 

또 어떤 날은 그 상사와 나 그리고 함께 사무실을 쓰는 다른 팀의 남자 직원만 사무실에 있던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그 남자 직원에게 “00 씨는 왜 여자 친구가 없어?”라고 묻기도 했다.

오해일 수도 있으나 이 상사라면 충분히 의도를 의심해 볼 만하다.     


상사와 외근을 나갔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성에 대한 얘기가 나오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분명 작년에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했지, 남자 친구가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그 상사는 왜 내게 당연히 남자 친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기분 나쁘네.     


5. 

확인된 바가 없으니 나만의 오해였으면 좋겠는데 

상사는 자기보다 어린 여자 직원을 뽑으면서 살갑고 애교 많고 늘 밝게 웃으며 

네네하는 사람은 원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고 네네 하기엔 내가 경력이 많아 아는 것도 많으며 

밝게 웃으며 말하기엔 상사 및 그의 아랫사람들 능력이 내눈에는 형편없다.


아마도 나를 이렇게 만든게 본인이라는걸 그 상사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내가 다른 직원들과 잘 웃고, 잘 지내는데 느끼는 게 없을까 궁금해진다.

     

6.

나는 잘 안다. 

상사가 나를 탐탁지 않아하는 이유가 ‘살갑지 않아서’라는 것을.

자신이나 팀원을 우쭈쭈 해주지 않아서 라는 것을.


그런데 그런 건 왜 여자인 나만 해야 하는 것일까? 남자인 직원들은 하면 안 되는 건가?

내가 엄마도 아니고 여자 친구도 아니고 아내도 아닌데 

왜 여자라는 이유로 살갑게 대해야 하는 걸까?   

  

내가 여자인 직원이라고 해서 어떠한 혜택을 요구한 적 없듯이 

그들도 여자인 직원을 두었다고 해서 어떠한 혜택(?)을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자인 직원은 꽃이 아니다.

화사할 필요도 밝을 필요도 살가울 필요도 없다. 

여자인 직원은 남자인 직원과 똑같이 

그저 회사에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구성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사무실에 꽃이 필요하면 양재 꽃시장에 가보시길.

아주 싱싱하고 예쁘고 향기로운 꽃을 내 연봉보다 훨씬 더 저렴한 가격에 사무실로 데려올 수 있다.


또 회사생활에 의지 할 수 있는 오피스 와이프를 기대한다면

집에 계신 본인 와이프한테나 잘하시길.

본인 남편이 밖에서 다른 여자한테 이렇게 잘 삐지는거 아시나 몰라.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을 "사회생활"이라고 후려치지 마시길.

사회생활이라고 할꺼면 남자인 직원들한테도 똑같이 살갑게 말하라고 요구하고

사무실 분위기 좀 밝혀보라 하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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