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혜 Aug 10. 2020

아직은 우박 같은 날이에요.

파리에서의 첫 번째 할 일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여 낯선 침대에서 눈을 떴다. 

적당히 서늘한 차가운 공기에 몸을 움츠리다 이내 다시 이불속으로 숨어들었다.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일단은 마실 물도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고, 프랑스 유심도 사야 했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해야 했음에도 나는 해가 충천에 뜰 때까지 

볼레를 (프랑 창문 밖에 설치된 덧창) 꽁꽁 닫고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두려웠나 보다.

꽤 많이 파리로 여행을 왔음에도 막상 '살아가기'위해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게 

왠지 모를 부담으로 다가왔다. 

몇 번의 알람을 무시하고 SNS를 탐색하고 유튜브를 보면서 애써 해야 할 일들을 외면하고 

미루고 미루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집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까르프라는 대형마트가 있었다.

먼저 그곳으로 가 먹을 것과 마실 물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장 봐 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지하철역으로 가 한 달짜리 교통카드를 충전했다.

이곳에서 새로 살 생각으로 쓰던 화장품을 그대로 들고 왔는데 그마저도 없는 것들이 있어서 

약국에 들려 몇 가지 화장품들을 샀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유심을 사기 위해 휴대폰 통신사를 찾아갔다. 


무척이나 흐린 날이었고 곧 비나 눈이 와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였다.

눈 오는 파리를 보고 싶었으므로 눈이 오기를 조금 더 기대했지만 그날 파리에는 하얀 우박이 눈처럼 쏟아졌다.

정확히는 비와 눈 그 사이 어디쯤이었다.

내리는 속도는 비와 같았고 내리는 모양은 눈 같았다. 


우산 없이 나왔는데 우박을 맞기에는 너무 아파서 잠시 건물 밑에서 잦아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필이면 그곳은 삼성전자 매장이었다.

삼정전자 매장에서 겨우 우박에 몸을 피했는데 문득 올려다본 풍경에,

만약 파리에 눈이 오면 이런 모습 일까 잠시 상상하다가 설레어서 행복했다.

어쩌면 눈 오는 파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지도를 보고 걷고 있음에도 주변을 몇 번이나 빙빙 돌아서야 도착했다.

여행할 때도 매번 그렇게 빙빙 돌아 통신사에 도착했었는데 참 여전하다 싶었다.


한 달짜리 유심을 사고 핸드폰에 끼워 넣었다.

밀려들어오는 한국의 카톡 메시지에 잠심 왈칵- 마음이 차올랐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이곳에 온 건은 아니었다.

여행과 삶 그 어디 즈음에서 아직은 비인지 눈인지 모를 우박 같은 날들이다. 

이런 나를 어떤 사람들은 한심해 할 수도 있겠지만 꼭 무언가를 계획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이곳에서는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다.


이런 무모한 나를,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응원해주고 있다. 

이렇게도 철이 없는 나는 생각보다 많은 응원을 받고 있었다.


잘 살고 싶어 졌다. 이곳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컵라면의 위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