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대표한다는 것의 무게
어느덧 임기를 마치는 시기가 됐다.
문득 베이징에 처음 나올 때가 생각난다.
촌에서 올라온 당시 그 각오와 비장함은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그지없다.
뭔가 실수하거나 못하면 내 뒤를 잇는 사람들의 앞길을 막는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오랜 지인들은 잘 알다시피 나는 지방러다.
그러니까 엄연히 말하면 '지방-서울-지방-서울' 사람 정도 될까?
고향에서 초중고를 나와서 서울로 대학을 다니다가 우연히 들어간 공항에서 채 1년을 못 채우고 지금 일터로 이직했다.
이직을 하면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근간의 사정이 있지만, 굳이 그런 사실들을 적시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당시에는 고향에 내려가 편히 쉬고 싶었다.
뜻 밖에도 한참을 떠나 있던 고향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뭘 하든 느껴지던 그 텃세에도 6년을 사건기자로 전북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신분이 본디 6두품 역관 출신이라 그런지 기자상 뽐뿌를 받아 그 기세로 어찌어찌 베이징까지 왔다.
다시 서울러가 된 것이다.
다시 돌아온 서울에서도 나는 이방인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기자에게는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이유는 이런 이야기가 듣기 싫었기 때문이었던 거 같다.
'저런 애를 베이징에 보낸다고?'
일거수일투족이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느낌은 개썅 마이웨이로 살아온 나에게도 무지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었다.
그렇게 어리바리한 상태로 나는 여행용 트렁크 2개를 들고서 베이징 서우두 공항 도착층에 내렸다.
광활하고 막막하게만 보였던 중국 대륙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크고 깜깜한 무대였다.
이미 사드의 광풍이 불고 있던 차에 부임하자마자 김정남이 피살당했고, 트럼프 취임과 시진핑 2기가 막 닻을 올리던 참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김정은 4연벙 러시.
누가 정말로 그런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지방에서 온 기자는 이래서 안 돼'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미친 듯이 베이징 바닥을 훑고 다녔다.
무슨 스파이라도 된 양 북중일 온갖 인사와 '첩자'라는 사람들도 만나고 다녔다.
중국 공안에 붙잡히는 일은 일상이 되었고, 내 우려와 달리 '지방러'에게는 비판보다는 격려가 쏟아졌다.
막내에서 벗어나며 놨던 사무실 살림 업무도, 회사차 운전기사 역할도 내 손에 떨어졌지만 불평하지 않고 받아 했다.
그 뒤로 무슨 일이든 '지방에서 와서 그런가..' 소리가 듣기 싫어 열과 성의를 다해 야무지게 하려고 했다.
임기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돌아보면 회사에서도 큰 실험이었고, 개인적으로도 큰 도전이었던 특파원 생활이 잘 마무리 지어진 것 같다.
내가 나온 뒤로 3명의 지방 기자가 더 특파원으로 내정됐다.
뭔가 선구자의 역할을 했다고 생색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보다는 내 뒤를 이어 오는 동료에게 지방 기자로서 자부심을 품고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일하기를 당부하고 싶다.
(BGM : Englishman In New Y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