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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원 Dec 11. 2022

즐기거나 놀리거나,

더 메뉴, 2022

들어가며

얼마 전 길에서 '하이엔드 데이팅 어플'의 버스 광고를 보았다. 데이팅 어플에 하이엔드 이미지를 녹여내야 했던 마케터들의 심경이 궁금했다. 검은 배경에 금박 띠의 디자인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 광고를 '내가 깔아야 하는 어플이군'하고 까는 사람들을 상상해봤다. <더 메뉴>를 보고 이 버스 광고가 먼저 떠올랐다. 영화와 광고의 결이 비슷해서라기보다는 그 광고를 보고 '어플을 까는 사람들'을 왜 그렇게까지 우스꽝스럽게 상상했는지 궁금했다. 그동안 즐겼던 '블랙코미디'에 의문을 갖게 만드는 영화 <더 메뉴>다.




즐기거나 놀리거나

영화는 단순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 설정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영화 첫 장면부터 '호손'이라는 12명만 받는 180만 원의 레스토랑만이 있는 섬을 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보여준다. 주인공인 마고(안야 테일러 조이)의 시점으로 각 인물들이 보여준다. 함께 온 타일러(니콜라스 홀트)는 호손의 셰프인 슬로윅(레이프 파인스)의 광적인 팬이자 파인 다이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인물이다. 그 외에도 배에는 이 식당을 11번째 방문하는 부유한 노부부, 저명한 음식 평론가, 부를 과시하러 온 젊은 남성 셋, 한물간 할리우드 배우 등 여느 블랙코미디 영화에서 볼 법한 인물들이 탄다.


이들이 간 레스토랑 호손 또한 과하다. 기계적인 친절을 보여주는 종업원 엘사, 모든 직원이 한 방에서 지내는 숙소(심지어 변기가 같이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셰프와 그에게 충성하는 모든 종업원 등 식당의 모든 것이 과장됐고 그것에 열광하는 손님들도 과장됐지만 여느 블랙코미디 또는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사치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영화가 진행되면 결국 식당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소비자'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생산자'로 극명하게 나뉜다. '생산자'인 셰프 슬로윅은 갖가지 이유로 자신의 서비스를 소비하던 소비자에게 복수한다. 하지만 '왜 복수하는 가'를 따라가다 보니 <더 메뉴>는 단순한 블랙코미디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복수하는 가'

영화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는 사건은 '생산자'의 죽음이다. 슬로윅과 같은 셰프가 되고 싶었던 부쉐프로 그는 '소비자' 앞에서 자신은 절대로 슬로윅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며 자살하고 '난장판'이 시작된다. 그 자살은 '난장판'이라는 메뉴로 소개된다. 소비자들은 당황하지만 이내 연극적이고 컨셉추얼 하고 스토리텔링이 있다며 진정하고 감탄한다.


생산자의 죽음에 동요하지 않던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치부가 또르띠야에 드러나자 크게 동요한다. 생산하는 이의 죽음은 스토리텔링이라며 포장하지만 자신들을 향한 공격은 참을 수 없는 소비 만능주의의 단편을 보여주는 듯싶었다. 그렇게 점점 생산자들은 소비자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열한 번이나 왔지만 메뉴를 한 개도 기억하지 못하는 단골, 자신의 힘을 멋대로 휘두르는 평론가, 그저 과시하기 위해 식당에 온 사람들 등 생산자는 자신의 생산물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않는 소비자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이토록 완벽히 분리된 듯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모호나 존재가 바로 주인공 마고이다. 마고는 본명도 출처도 숨긴 채 타일러의 전 여자 친구를 대신해 파트너로 호손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왔다. 마고는 소비자도 생산자도 아닌 애매한 인물이다.





모호해지는 대상과 경계

처음에는 슬로윅의 행동과 원인을 이해하기 쉬웠다. 하지만 곧 그 이유가 모호해지고 이 모호함은 과장된다. 브라운 대학교를 학자금 대출 없이 나왔기에 죽음을 선고받은 인물도 있다. 그 모호해지는 경계와 대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두 장면이 나온다. 하나는 슬로윅은 마고를 불러내 이쪽(생산자)인지 저쪽(소비자)인지 정하라 말하는 장면이다. 또 하나는 한물간 할리우드 배우의 영화가 너무 재미없어서 나의 주말을 날려버린 죄로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슬로윅의 이런 행동은 생산자와 소비자는 명백하게 나눌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슬로윅은 자신을 철저하게 생산자로 이입해 행동한다. 하지만 그도 그의 식당에 온 소비자들처럼 행동했고 마고를 자신의 이분법의 틀에 끼워 넣으려 애쓰지만 이내 실패한다.


슬로윅이 주장하고 관객이 동의해온 소비자와 생산자의 이분법은 틀렸다는 걸 증명하는 듯 보였다. 사실 우리도 사회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정체성이 양립한 채 살고 있다. 그러나 두 정체성을 절대 섞지 않는다. 그 시점의 역할이 나의 유일한 정체성인 듯 과몰입해 행동한다.


결말부에서 레스토랑에는 결국 소비자로 과몰입한 손님들과 생산자로 과몰입한 식당 직원들만이 남는다. 과몰입한 생산자와 소비자 일동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까지 아주 지독하게 자신의 생산자성과 소비자성에 취해있는 듯 보인다. 이분법에서 벗어난 마고만이 불타는 그들을 바라보며 맛있는 치즈버거를 먹을 수 있었다.





즐기거나 놀리거나 인정하거나

사회를 단순하게 나눌 때 그것은 마치 명확하게 꿰뚫는 듯 보이지만 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내가 '하이엔드 데이팅 앱'을 보고 그 앱을 다운로드하는 사람들을 웃기게 그렸듯 대부분의 블랙코미디는 대부분 돈 많고 힘 있는 <더 메뉴> 속 소비자를 희화화한다. 꼭 실제로 돈이 많지 않더라도 '돈이 많아 보이려는'사람들도 풍자의 대상이 된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는 '골프', '외제차', '오마카세' 등으로 대표되는 과시와 사치를 하는 사람들을 조롱한다.


<더 메뉴>는 그런 풍자와 희화화가 가득한 세상에서 그런 풍자와 회화화마저 우습게 묘사한다. 부자, 속물, 나르시시스트 그들을 '참교육'하겠다는 인물까지 한데 모여 담담하게 '음식에 대한 모욕'이라는 스모어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이 영화 진짜 골 때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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