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 사람 Mar 13. 2021

“절대 돌아보면 안돼, 터널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터널에서 뒤돌아본다는 것의 의미


이삿짐을 가득 실은 승용차가 교외의 한적한 도로를 달린다. 뒷자석에 탄 치히로는 풀이 죽어 있다. 정든 친구들과 헤어져 낯선 시골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해야하는 상황이 그녀는 마뜩치 않다. 이곳 지리를 잘 모르는 아빠가 지름길이라 예상하고 들어온 도로의 끝은 석상으로 막혀있다. 차에서 내린 엄마와 아빠는 치히로의 만류에 아랑곳없이 석상 뒤의 터널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간다. 터널 밖의 초원을 지나 물이 졸졸 흐르는 징검다리를 건너자 쇠락한 테마파크가 있다. 매대 가득 차려진 기름진 요리를 발견한 부모는 주인 없는 가게에서 마음대로 음식을 먹는다. 치히로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돌아온 사이 엄마와 아빠는 돼지로 변해 있다. 날이 어두워진다. 하천은 그새 잔뜩 물이 불어 건너갈 수 없게 됐다. 치히로는 이상한 세계에 갇혀버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신령의 세계에 갇힌 소녀가 돼지로 변한 부모를 구하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 세계는 일본과 유럽의 풍속, 전설, 민담의 요소들로 모자이크처럼 구성돼 있다. 유바바 응접실의 장식과 소품은 유럽귀족의 저택같은 분위기가 난다. 치히로가 숙식하며 일하는 건물은 일본식 온천탕이다. 온천건물의 직원과 손님은 모두 요괴이지만 온천의 위계구조와 관습, 생활방식은 인간세상과 유사하다. 그들의 욕망마저 인간의 그것을 빼닮았다.     


 이 만화영화는 물질적 욕망만을 좇다보면 인간이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이야기의 출발점은 90년대 초 일본의 거품경제 때 우후죽순으로 지어졌다가 망한 테마파크다. 노점식탁 가득 음식접시를 늘어놓고 허겁지겁 통닭과 초밥을 삼키는 엄마와 아빠는 식탐을 넘어서 탐욕에 사로잡힌 것만 같다. 돼지로 변한 부모는 스스로가 인간이었단 기억을 잃어버린다. 유바바의 온천에 몰래 들어간 가오나시가 직원들을 현혹하는 수단은 사금이다. 직원들은 가오나시가 만들어 흩뿌리는 사금에 열광하며 그의 추종자가 된다. 그 와중에 몇몇은 가오나시에게 잡아먹히기도 한다.     


  검은 옷에 하얀 가면을 쓴 가오나시에겐 얼굴과 목소리가 없다. 뱃속에 집어삼킨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고서는 말 한마디 못한다. 가오나시가 절실하게 바라는 것은 치히로의 애정인데 ‘자신’이 없는 그로서는 사랑받을 도리가 없다. 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무언가를 주는 것이다. 그는 치히로에게 온천수 팻말을 훔쳐 건네거나, 사금조각을 잔뜩 선물한다. 치히로가 ‘내가 갖고 싶은 걸 당신은 절대 줄 수 없다’며 호의를 거절할 때 가오나시는 무너져내린다. 이제껏 폭식했던 음식을 모조리 토해내며 절규한다. 가오나시가 진정되는 때는 치히로가 곁에 가만히 앉아있는 걸 허락해주고부터다. 돈으로 애정을 사는게 가능할까? 돈이 사라지면 돈으로 구매했던 애정은 어떻게 되는걸가? 시간이 지나자 가오나시가 뿌렷던 사금은 볼폼 없는 흙으로 변해버린다. 그가 가짜 금을 뿌렸던 게 아니라 원래 금에는 흙 이상의 가치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온천건물에서 살아가려면 이곳의 주인인 마녀 유바바와 계약을 해야 한다. 간신히 일해도 된다는 허락을 얻어낸 치히로(千尋)가 계약서에 이름을 적자 유바바는 마법으로 앞뒤 글자를 들어내 ‘센’(千)이라는 글자만 남긴다. 그녀가 원래 세계로 무사히 돌아가려면 자신의 이름이 ‘치히로’였단 걸 잊어선 안된다. 마녀는 이름을 빼앗는 방식으로 누군가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치히로를 은밀하게 돕는 ‘하쿠’가 원치않는 부정한 일을 하며 마녀밑에 있는 것도 이름을 빼앗겨서이다. 이름은 누군가의 정체성이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건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바랐었는지 잊지 않는 것이다. 그녀가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센으로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본명인 치히로를 자꾸만 되뇌어야 한다.     


 온천직원으로 지내게 된 치히로는 바닥을 기어다니며 걸래질을 하고 때에 찌든 대형 욕조를 청소한다. 그녀에게 고된 삶을 헤쳐나가는 특별한 비법은 없다. 눈 앞에 주어진 일을 온 힘을 다해 해 나갈 뿐이다. 치히로의 성장은 이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이기에 영화 곳곳에서 한 존재의 성장에 유용한 조언을 들을 수 있다. ‘한번 손댔으면 끝까지 해!’라는 가마할아범의 호통, 폐쇄된 아기방에만 있으려는 부에게 치히로가 들려주는 ‘병은 바깥보다 이런 방안에서 훨씬 잘 걸린다구!’, ‘부모를 구하든, 남자친구를 구하든 직접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이 세계의 규칙이니까.’라는 제니바의 조언이 그것이다. 가정이라는 안전망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먹여살리려 애쓰며 치히로는 점점 용감하고 의젓해지지만 그녀가 결정적으로 변하는 계기는 하쿠에 대한 애정이다. 하쿠를 해치려는 무리에 맞설 때 치히로는 이전의 겁 많았던 자신을 뛰어넘는다. 이전에 두려워했던 것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바다열차를 타고 제니바의 집에 찾아가 저주에 걸린 하쿠를 구원하고, 유바바의 시험을 통과해 부모도 구한 치히로는 마침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시공간의 경계에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눌 때 하쿠는 치히로에게 단호하게 당부한다.


절대 돌아보면 안돼터널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수차례 이 영화를 봐왔으면서도 서른을 훌쩍 넘어서까지 뒤돌아본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의림지전설의 며느리가, 그리스신화의 오르페우스가 왜 뒤돌아본 대가로 모든 걸 잃어버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뒤돌아보는게 뭐 대수라고 이제까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돼버리는 걸까?     


  인생의 한 국면에서 다음 국면으로 넘어가기 전 오랫동안 어두컴컴한 터널을 걷게 된다. 터널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통로다. 인생의 국면이 바뀌는 생의 질적 전환이다. 걷는 중에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므로 터널을 통과하는 사람은 누구나 불안을 느낀다. 그럼에도 터널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은 오직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 돌아본다는 건 자신과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힘을 의심하는 사람은 터널을 건너갈 수 없다. 다른 터널을 택했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사람도 터널을 건너지 못한다. 당사자에게 터널을 건너갈 여력이 있느냐와는 별개로 망설임 자체가 터널을 건널 수 없게 한다. 터널을 건너게 하는 힘은 내가 가야 할 유일한 길은 이 터널밖에 없다는 믿음이다. 기력과 정신에너지를 한 곳에 모아 앞만 보며 걷는 자만이 가까스로 통과할 수 있도록 인생의 터널은 아슬아슬하게 만들어져 있다.     


  나는 오랫동안 어떤 터널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입구에서 망설였다. 많은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이유로 터널을 택한적도 있다. 조금 걸어들어가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아 멈춰섰다. 더 짧고 걷기에 편하면서도 결과가 보장된 터널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어떤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지 알지 못했기에 오랜 시간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둔한 나는 긴 시간을 어두운 곳에서 헤맨 후에야 뒤돌아봐선 안된다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인생의 모든 터널을 뒤돌아보지 않고 깔끔하게 통과하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뒤돌아봤다가 일을 그르치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설화는 뒤돌아보았다가 모든 걸 잃은 사람들이 뼈아픈 후회에서 지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신령의 세계를 빠져나가기 직전의 치히로가 한순간 뒤돌아보려 했을 때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그의 기쁨과 슬픔'이 아닌 <그의 슬픔과 기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