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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야 Jun 02. 2019

박선아 <어떤 이름에게>

용기, 비밀, 기다림 그리고 고마움



이번 어버이날, 부모님은 카네이션을 들고 할머니 산소에 갔습니다. 그날 밤 문득 십 년 전쯤 할머니께 받은 쪽지가 생각나 편지를 모아둔 상자를 뒤적여 찾았어요.


"사랑하는 해민, 생일 추카한다. 엄마애개 잘하고 학교 조심하개 잘 다녀라. 할머니가.”


상자에는 이제는 잊혀진 이름과 여전히 소중한 이들에게 받은 편지가 가득했습니다. 누구에게 받았는지 어떤 내용인지 전부 기억나진 않지만, 대부분은 5월에 받은 생일축하 편지였어요.


"매일 아는 이름이 늘어나고, 알고 있던 이름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우리는 그중 어떤 이름을 기억하게 될까.” - 1쪽


손에 잡히는 대로 편지를 읽다 작년 여름 <호텔 어라운드>에서 열린 박선아 작가의 『20킬로그램의 삶』 전시에서 본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집 부엌에 받은 편지를 붙여 둡니다. 가끔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이 "선아씨는 사랑을 많이 받나 봐." 하면 "누구나 요 정도 양의 편지는 받아보지 않았을까요. 꺼내두질 않아 그렇지." 하곤 해요. 그럼 다들 고개를 끄덕이거나 멍해지던데, 집에 있는 편지들을 떠올리는 걸까, 싶습니다.

평소에는 편지 상자의 존재를 잊고 지내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아 상자에 넣는 순간을 좋아합니다. 겨울을 대비해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뿌듯합니다. 제 마음도 누군가의 도토리가 되길 바라며 종종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생일 축하한다고, 따뜻한 연말 보내라고, 그때 미안했다고, 잘 지내냐고.

요즘엔 좀처럼 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써놓고 전하기 쑥스러워 서랍에 둔 엽서도 몇 장 있습니다. 인색한 스크루지가 되고 싶지 않아 오랜만에 책장에서 이 책을 꺼냈습니다.


"무엇인가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 - 축제에, 눈에, 꽃 한 송이에... 그 무엇에든지. 그렇지 않으면 잿빛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몹시도 가난하고 꿈이 메말라버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주 쉽사리 자기의 동심을 잃어버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 한 사람의 스크루지가 되어버린다." -76쪽


책은 서간집과 뜯어 쓸 수 있는 엽서집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의 겉싸개 뒷면에는 아빠에게 쓴 손편지가 있습니다. 제작하려면 손이 많이 갔을 텐데 정작 표지에는 제목도 저자도 출판사도 적혀있지 않습니다. 서가에 꽂혀있으면 책등으로 제목도 저자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이 "선물 같은 책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는데요, 마음을 전하기 좋은 5월에 함께 읽고 싶어 소개합니다.


책은 작가가 베를린, 바르셀로나,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가족, 친구, 동료, 고양이에게 보낸 편지를 엮었지만, 여행지도 수신인도 중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여행하며 마주한 이야기인데 먼 이국의 풍경보다 옆 동네의 풍경이 떠오릅니다. 여유로운 관찰자가 된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면 고양이, 달팽이, 할머니처럼 작고 느린 것에 닿습니다.


"작고 느려서 잘 보이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이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과 그들의 생을 생각하는 시간이, 그런 것들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163쪽


글을 쓰다 해 질 녘에 동네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노래를 듣고 있는데 옆에서 꼬마가 비눗방울 놀이를 하더라고요. 작은 눈이 비눗방울을 따라 반짝이는 게 귀여워 한참 바라봤습니다. 꼬마가 만든 비눗방울 덕에 놀러 나온 다른 아이와 부모 모두 즐거워했습니다. 평소같으면 노래를 들으며 스마트폰을 봤을텐데 시선을 옮기니 아름다운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 책이 오늘 제 삶을 조금 움직였습니다.


"나 내 아이폰을 너무 좋아해. 이걸로 할 수 있는 게 많거든, 그런데 얘 때문에 멀어진, 사랑하는 것들도 많아" -143쪽


처음 책을 읽을 땐 편지를 전할 때의 떨림, 여행지에서 보낸 엽서의 애틋함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읽으며 누군가에게 용기를 내서 편지를 전하고, 답을 기다리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특별해진 순간들을 회상했습니다. 옛친구처럼 멀어진 "용기, 기다림, 비밀" 같은 단어가 생각났어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는 잊고 지낸 것들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기다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 얘기를 듣고 행복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나'를 행복하게 해줄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즐겁지.” -186쪽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천진난만함을 좋아합니다. 그가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궁금해서 그가 잡지에 연재하는 글을 챙겨보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때마다 읽는 건 보장된 행복이니까요!



"매 순간을 용기 내며 살 수는 없는데, 용감한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용기 있는 사람이 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121쪽


이 책을 읽은 것만으로도 조금은 용기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오늘도 책을 읽고 겨우 한 발짝 나아갑니다. 부쩍 더워진 날씨에 이 문장을 보태며 마칩니다!


"번거로울 법도 한데 여전히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지. 이번 여름엔 보고 싶은 것이 있는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그러니까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곤 했어. 요즘은 애써 기다리는 시간을 만들곤 해." -178~179쪽




                                                                                                   - 박선아 <어떤이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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