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여 Feb 13. 2023

영화가 말했다, “우린 강하다”

어떠한 ‘존재’가 된 영화에 대하여


한동안은 글쓰기가 영 쉽지 않았다. 감수성을 깨울만한 유익한 자극도 적었을뿐더러 약간의 권태기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잠들어 있던 공황이 다시 올라오는 덕분에 감성을 기피하기만 한지라 손끝에 마음을 담을 여력조차 없었다. 그런데 데자뷰일까, 무려 7년도 더 된 순간의 기억과 그때의 감정이 다시 돌아오면서 천천히 제 페이스를 찾았다고 하면, 이건 뭐라 부를 수 있는 걸까?


무너지고 깨어지던 붕괴의 순간에 나를 일으켜 세웠던 건 한결같이 영화였다. 꼭 나를 닮은 열정을 가졌던 이가 절망에 뒤돌았다가도 이내 다시 일어서는 씬을 보면서 상영관 내 그 누구도 울지 않던 포인트에서 홀로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 그런 건 애초에 없었던 내게 영화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었다.


늘 그렇지만 나에게 영화는 직업이 아니다. 마케터이면서 카피라이터이고, 에세이스트이면서 전략기획가인 이 시점에서 ‘직’은 아니더라도, ‘업’일 순 있지 않은가 얘기해 볼 법 하지만 그보다는 ‘존재‘나 ’영향력‘에 가깝다. 마치 사람같을 때가 있다. 누구보다 나를 가장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고, 무지한 나를 깨우는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무수히 많은 해결책과 고민과 경험이 내 시야와 기억에 서려 있다. 그 잔상이 나를 지탱하는 무형의 기둥이 된다. 참 신기하게도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날 존재하도록 지탱한다.


사소하게 예를 들면, 지난 1월에 본 <더 퍼스트 슬랭덩크>로 한동안 다른 콘텐츠는 볼 수도 없었다, 너무 빠져있어서. 하지만 실상은 다른 걸 볼 마음의 여력조차 없었다. 일상에 부딪히는 모든 요소들로부터 발작할 것만 같은 동요가 일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달까. 공황이 주는 두려움은 바로 그 지점이다, 인정하는 순간 나에게 큰 벽이 생기고 그 벽을 허물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또 다른 벽이 한 꺼풀 더 생겨버린다는 거. 그 틈에 갇힌 나를 바라볼 용기는 더더욱이 없었다.


의사의 진단은 애초에 받았지만, 스스로 극복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스스로 빠르게 인지하고 극복하기 위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 의사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봤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주어진 환경이 뒤틀리는 순간, 다시 이 혼돈을 맞닥뜨릴 여지가 충분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자력으로 외부의 압력에 대응할 힘을 기르고 싶었다. 서점에서 닥치는 대로 공황장애에 대한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자각하는 방법, 극복하는 방법에는 모두 하나같이 용기가 필요하다더라. 무슨 이런 당연한 말을… 문자로 읽는 진리에는 이렇게 종종 화가 난다. 건조한 진실이라 그랬을까. 삶이라는 것 자체가 용기가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시선을 끌었던 대응 방법은 치료 후 어느 정도 극복할 자력이 생긴 다음엔 두려운 상황에 지속적으로 맞닥뜨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주로 퇴근길, 또는 계단을 오르면서 공황이 찾아왔다. 처음엔 울렁거리고 어지럽더니 이내 바닥이 눈앞으로 몰려온다. 어떤 압박감이면 헛것이 보일까 싶어 처음 이 순간을 경험했을 때의 두려움은 아직도 치가 떨리게 생생하다. 5월의 한가한 노을 아래 살랑이는 쾌적한 바람에 모두가 행복한 얼굴을 띠며 퇴근하는데 내 눈앞엔 난생 처음 경험하는 재앙이 펼쳐졌다. 그 어려움을 겨우 극복했건만 잠잠하던 시간이 지나 지난달부터 이 증상은 또 시작됐다, 예견된 바와 같이. 계단 오르내리며 운동하길 좋아했던 나인데 오르려고 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 뒤로 나자빠져 죽을 것만 같은 공포와 위협이 압도해왔다. ’죽을 거야, 이러다가 뒤로 자빠져서 죽을 거야. 발에 힘이 없어. 왠지 헛디딜 것 같아. 못 걷겠는데 멈추면 이대로 뒤로 떨어져 죽을 것 같아. 나 죽나 봐.‘ 그 상황에는 논리적인 사고가 작동되질 않고, 오로지 이 생각 말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숨이 가빠 오고 심지어 이 증상이 출근길에 발생하면 매우 곤란하다. 곧 쓰러질 것처럼 호흡하면서 정상에 오르면 다리 힘이 곧 풀릴 것 같아 어디든 우선 앉는다. 그렇게 그날도, 그다음 날도, 매일 지각을 한다. 결국은 30분 일찍 출근하는 버릇마저 생겼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지금껏 7회를 봤다. 공황인 주제에 많이도 봤다 싶겠지만, 사람이 많아서 오는 광장 공포증과 유사한 공황과 특정 상황에 처했을 때 느끼는 공황은 사뭇 다르다. 아무튼, 이 영화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그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이유‘. 영화 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다른 브런치 작가들도 꽤나 많이 언급한 명대사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심장이 쿵쾅거려도
있는 힘껏 센 척을 한다


처음에는 그저 영화 속 대사 중 한 줄로 느껴졌던 말이 계속해서 듣다 보니 주문이 된다. 나 홀로 극복해야 했던 문제, 아무도 몰랐기에 도움을 줄 수도 없었던 문제를 ‘네’가 안다. 존재하지도 않고, 형체도 없어야 할 네가 대꾸를 해온다. 영화가 대뜸 손을 내민다. 늘 그렇다 너는, 다른 사람의 삶과 시선이 세상과 나에 대한 이해로 다가오도록 이끈다. 송태섭이 각성하는 음악으로 내가 각성하고, 뇌리에 남아있는 장면이 힘을 건넨다. 계단 앞에 서서, 이어폰으로 쏟아져 나오는 함성같은 음악을 들으며,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긴장을 풀고, 주먹을 꼭 쥔 채 오른다. ‘괜찮아, 난 오늘 이걸로 죽지 않는다.’ 공포를 바득바득 이겨내고, 두려워도 강한 척 걸음을 계속 올린다. 이를 악물고 머리카락과 발가락 끝까지 힘을 주고 돌파한다. 그 걸음에는 나만 있지 않다. ‘우리’가 함께 걷는다. 영화는 그런 존재다.


말도 안 되는 순간에 늘 그렇듯 말도 안 되게 내 곁에 있는 존재라서 영화는 참 각별하다. 어쩌면 글을 쓰고 싶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스워 보이지만 덕분에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날 보면서, 누군가도 이렇게 오늘 하루를 살아내었고, 내일도 이겨낼 참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낀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 모두가 화면을 향해 앉아 어둠 속에서 서로와 각자의 시간을 공유하는 이유가 뭘까?


작가의 이전글 지극히 슬픈 위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