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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 Jan 01. 2020

대중과 연구자 사이

너무나 멀고 먼 당신

"대중화" 


연구자들이 흔히 하는 고민이다. 학문의 길을 걷는다고 해서 세상과 등지고 살 필요도 없는 것이고, 연구의 가치는 거의 언제나 사회적 반향에서 오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살아생전에는 그리 주목 받지 못하다 뒤늦게 재평가 받는 사람들도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역사적 인물 상당수는 이미 살아생전에 일정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이 찬사냐, 혹은 비난이냐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인간적으로도 내 일을 누군가 이해해주지 못한다면 끝없는 외로움에 빠지기 마련이다. 필자의 아버지는 여전히 당신의 아들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마 대학원생 자녀를 둔 많은 부모들(부모가 교수가 아니라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대체 이건 왜 하니?"라는 눈초리를 받으면 더 큰 외로움에 빠지는 법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인간관계에 몰두하는 것이 많은 연구자의 삶이기도 하다.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해 새로운 인간관계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이 대중과의 접점을 고민한다. 누군가는 더 큰 부와 명성을 누리기 위함이고, 누군가는 이 사회 안에서 투명인간처럼 존재했던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고민한다. 이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그 고민의 숫자도 많다. 누군가는 그 고민 자체를 손가락질하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에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기고 싶고, 누군가에게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하는 욕망도 마찬가지다. 연구자는 수행자가 아닌만큼 많은 것을 억누르고 살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메워지지 않는 간극


  하지만 대중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학문활동의 상당부분은 해당 분야의 발전에는 기여하고, 알게 모르게 우리 삶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지만, 그 영향을 체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철학의 예를 들어보자. 실제로 철학과에서 나오는 연구들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인문 에세이'의 내용과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 20세기를 기점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분석철학의 흐름은 해당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면 그 내용을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혹자는 이를 '언어로 하는 수학'이라고 평하는데, 철학계 내에서도 이를 두고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필자의 영역인 역사학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나타난다. 대중의 역사인식과 전문적인 역사연구 사이에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 공백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동원'에 대해 역사교과서에서는 대체로 '강제동원'이라는 표현 하나로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함축한다. 그러다보니 '강제동원'에 대한 이미지는 노란 구일본군복을 입은 일본 헌병이 조선인 여성을 연행하는 영화 <귀향>에서의 이미지를 연상케한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보다 복잡한 구조 안에서 시행된 제도였다. 이 문제는 일본의 공창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여성문제이기도 했고, 총력전 체제에서 국가가 어떻게 국민 개개인을 통제했는가를 보여주는 정치적 문제이기도 했다. 한 편으로 동원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일본인 여성의 동원과정과 식민지인, 전쟁포로, 점령지 주민들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그 차이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식민지 지배의 문제와 피지배인과 포로, 점령지 주민을 대하는 일본의 잔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강정숙, 2010) 대부분의 대중 역사서나 교과서는 복잡한 구조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역사적 사건에 대해 지극히 협소한 관점만을 제공하고, '선과 악'의 선명한 이분법만을 제공할 위험도 있다. 하지만 그 복잡성을 한국시민들 모두가 동등하게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이처럼 시의성 있는 주제도 그러한데, 대중의 관심과는 거리가 먼 미시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지적흥미' 이상의 가치를 획득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무의미한 활동'의 가치를 어떻게 옹호할 것인가?


   사정이 이렇다보니 실용과는 거리가 먼 학문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서 자신의 연구분야를 두고 "쓸모 없는 활동"이라고 자조섞인 소개를 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인문학 연구자들에게서 그러한 경향이 보다 짙게 나타난다. 연구의 '무쓸모'는 연구를 하는 자신들이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 연구자들이 이공계 연구자들을 만났을 때 느끼는 부러움은 대체로 이공계 분야의 연구들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당위성'에서 온다. 둘을 놓고 비교했을 때, 인문학 연구는 대체로 '고급스러운 취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인문학 전반에서 나오는 깊은 연구들이 연구자들에게만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예를 들어보자. 분석철학의 전통에서 철학자들은 오독, 혹은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지 않는 명료한 글쓰기와 짜임새 있는 논리를 강조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 하나하나의 의미에 대해서 한 번쯤 치열하게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하나의 화두를 두고 복잡한 사고체계를 형성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연구방식은 철학이 아니더라도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혹은 지성을 쌓고 싶은 이들에게, 그것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사고를 보다 정교화시킬 수 있는 경험으로 남게 된다. 분석철학 연구의 많은 부분은 논리학과 연계되는데, 논리학은 일정한 사고체계를 형성하는 연습을 제공하는 '코딩 교육'과도 연결시킬 수 있다. 수학과 컴퓨터공학에서도 중요한 기초과목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유용함을 찾아보게된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과거를 아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서 크게 도움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 그저 우리는 역사를 매개로 우리의 사고를 좀 더 확장시켜나갈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닌, 다른 시간, 다른 세상의 존재를 아는 것으로 우리는 전혀 상관 없는 것 같은 다양한 사건들을 서로 비교하고, 과거의 사건 속에서 나름의 성찰을 얻을 것이라 기대한다. 또한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오늘날의 삶의 방식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이해하고, 근본적인 원리와 해결책을 모색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목적성이 없더라도 누군가에겐 과거의 삶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중요한 것은 전혀 쓸모 없어보이는 활동 가운데에서 각자가 어떻게 나름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느냐에 있다. 연구자는 그저 대중과 만났을 때 자신의 연구를 제시하고, 설득할 뿐이다. 그 이상의 노력은 자칫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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