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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 Feb 18. 2020

맞는 말을 모아놓으면 다 맞는 말일까?

잘못된 논증은 옳다고 믿는 가치에 상처를 줄 뿐이다.

최근 경향신문에 실린 장대익 교수의 칼럼을 읽은 바 있다. 해당 칼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칼럼은 바이러스 감염의 문제를 다룬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확산된 요즘 사회에 맞는 주제라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장대익 교수의 글은 다소 의아한 면이 있다. 바이러스 문제를 막기 위한 장 교수의 솔루션을 담은 다음 대목을 읽어보자.



‘비상사태’를 넘어 바이러스 감염을 ‘일상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개인과 공동체가 그것을 책임감 있게 잘 지키는 것만이 모두가 살길이다. 수렵채집기와 농경시대 때 잘 통했던 회피 전략이 바이러스와의 현대전에서는 최고 전략이 아니다. 이제는 감이 아니라 똑똑함으로 승부해야 한다. 감염률과 치사율을 모두 고려하여 해당 바이러스의 특성에 적합한 확산 방지책을 합리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우리 뇌는 확률적 사고를 잘하게끔 진화하지는 않았으므로 사망자 수만 보고 과도한 걱정을 하기 쉽다. 하지만 사망률을 고려하면 별것 아닌 바이러스로 분류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백신과 치료법도 신속히 개발해야 한다. ‘자연주의’라는 미명하에 검증된 백신을 거부하여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남의 아이들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사이비단체는 바이러스만큼이나 위험하다. 길게 보면 새로운 바이러스 감염 발생 및 확산을 감지하고 예보하는 글로벌 예보 시스템을 구축해야 대유행을 조기에 막을 수 있다. 이런 데에 데이터 사이언스와 AI 기술이 활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근본적으로는 바이러스와 우리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가축의 수를 줄일 필요가 있다. 단지 맛에 대한 욕망 때문에 온실가스 배출량의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육류 생산 시스템이 가동 중이다. 전 세계 곡물의 3분의 1이 가축 사료를 위해 재배된다. 축산업은 농지보다 더 큰 규모의 삼림 벌채를 유발한다. 맛을 버릴 수 없다면 대체육 개발을 통해 가축의 수를 줄일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첫 문단을 먼저 살펴보자. 첫 번째 문단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장1 : 수렵채집기와 농경시대 때 잘 통했던 회피전략이 바이러스와의 현대전에서는 최고 전략이 아니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장2 : 감염률과 치사율을 모두 고려하여 해당 바이러스의 특성에 적합한 확산 방지책을 합리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장3 : 백신과 치료법도 신속히 개발해야 한다.

해당 주장에 대한 보충 : ‘자연주의’라는 미명하에 검증된 백신을 거부하여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남의 아이들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사이비 단체는 바이러스만큼이나 위험하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장4 : 길게 보면 새로운 바이러스 감염 발생 및 확산을 감지하고 예보하는 글로벌 예보시스템을 구축해야한다.


솔직히 필자는 장 교수와 같은 '데이터사이언스 + AI 만능론'을 좋아하진 않는다. '이거 하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된다'고 우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데, 이 글에서도 어떻게 이걸 활용해서 바이러스 확산 문제를 막을 수 있는가는 제시하지 않는다. 사실 장대익 교수는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 문단 이전에 장대익 교수가 진화심리학적인 주장, 그러니까 제러드 다이아몬드나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 또한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그러고보니 이 칼럼, 과학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환원주의스러운 입장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해서 당연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입장차이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의견에 수긍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차이일 뿐이다. 문제는 두 번째 문단과 같은 주장에 있다. 뜬금없이 장대익 교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마치 '육식'과 '공장식 축산'이라는 전제를 암시한다. 두 번째 문단을 쪼개서 보면 다음과 같다.


주장 : 더 근본적으로는 바이러스와 우리의 가교 역할을 하는 가축의 수를 줄일 필요가 있다.

주장에 대한 근거1 : 단지 맛에 대한 욕망 때문에 온실가스 배출량의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육류 생산 시스템이 가동 중이다. 

주장에 대한 근거2 : 전 세계 곡물의 3분의 1이 가축사료를 위해 재배된다. 

주장에 대한 근거3 : 축산업은 농지보다 더 큰 규모의 삼림벌채를 유발한다.


 물론 이 문단만 떼어 보면 틀린 주장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장식 축산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축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삼림이 파괴되고, 가축사료로 소모되는 곡물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읽는다면 장대익 교수가 지금까지의 논지와 큰 관련이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것이 왜 이 글의 주제인 '바이러스의 귀환', 그리고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연결되는지, 장 교수는 결코 설명하지 않는다. 기후온난화로 잠들었던 바이러스가 새롭게 확산될 여지가 생겼다 정도는 언급해주면 좋지 않았을까?


더 큰 문제는 그의 주장이 명색이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연구하는 학자의 주장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점에 있다. 그의 주장대로 가축이 인간과 바이러스 사이의 가교가 된다면, 가축의 숫자를 줄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숙주로 지목되는 건 야생동물인 박쥐였다. 그렇다면 장대익 교수는 마찬가지로 바이러스와 우리의 가교 역할을 하는 야생동물의 숫자도 줄여야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반대로 가축의 경우, 기생충과 바이러스, 세균의 감염을 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스템 속에 놓여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왜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일까?


일단 필자는 장대익 교수가 가축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머지 이유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동의한다는 점을 밝혀야겠다. 동물권, 기후, 그 밖의 많은 생태문제에서 공감대를 가지고 있으며, 장대익 교수의 논지를 비판하는 것은 그저 그가 너무나 어설픈 논증을 통해 공장식 축산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서 같은 입장에 서 있는 이를 비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설익은 논증은 우리가 지지하는 가치를 옹호하는데 충분치 않으며, 오히려 우리의 주장이 이렇게 빈약한 논리 위에 서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얼마든지 반대자들의 공격에 우리의 주장이 무너질 가능성을 노출시킬 뿐이며, 우리의 가치가 비판적 성찰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닌,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는 종교적 사고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칼럼의 주장을 거부하며, 반대자들보다 더 거세게 비판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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