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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mme soupe Aug 30. 2021

남편의 버킷리스트






파리를 잠시 떠나 프랑스 북쪽 섬으로 간다.




















남편의 버킷리스트


여행지에서까지 차를 빌려 운전을 하겠다는 남편을 말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파리 한 곳만 둘러보겠다고 해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데, 여행의 반을 쪼개 멀리 북쪽에 다녀오겠다는 남편의 계획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시원한 대답을 못하는 내게 남편이 보여준 것은 노르망디 끝자락 바다 위에 섬처럼 떠있는 성의 사진이었다. 성당이었고 수도원이었으며 감옥이기도 했던 가늠키 어려운 긴 시간과 이야기를 품은 아름다운 성 몽생미셸. 이곳을 가보는 게 꿈이야. 하고 말했을 때 그 꿈은 곧 나의 꿈이 되었다.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윈도우 시작 화면이 실은 실사였다는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너무나 그림 같아서 그림 같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풍경들 속에서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확고히 들었다. 그 윈도우 시작 화면에 들어와 달리고 있는 기분. 끝도 없는 지평선을 바라보고 싶다던 남편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웠다.





















이런 풍경들 속에 삶이 있다면 정말 화가가 될 수밖에 없겠어.라고 남편이 말했을 때 남편이 이런 말도 할 줄 아네. 하고 웃었다. 프랑스 비행기표를 끊어놓고 도서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에 관련된 책들을 빌려 아이들과 여러 번 읽었다. 태오의 이름이 태오인 이유를 알려주고 싶어서 이기도 했는데.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아직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무리한 일정으로 여행하고 싶지 않았기에 계획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선택과 집중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아쉽게 제외된 것들 속에는 빈센트와 아를이 들어있었다.


남편이 말한 아름다운 풍경과 화가. 두 개의 키워드는 저절로 빈센트와 아를을 떠올리게 했다.

얼마 전에 작곡가 김아람 선생님의 뮤지컬 <반 고흐와 해바라기 소년>을 보았고 언젠가 꼭 아를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얼른 뮤지컬 속 음원을 찾아 오디오를 열었더니 아이들이 서로 이 노래를 자기도 안다며 흥얼거렸다. 별처럼 반짝이는 아를의 해바라기 밭은 아니지만, 동화 같은 차창의 풍경과 함께 빈센트와 까미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이 순간 모든 것이 충분했다.

 
















보부아의 시골집

Normandie Beauvoir


삼각 지붕에 굴뚝이 하나 꼭 셋째 돼지가 벽돌로 차곡차곡 지었을 것 같은 프랑스 시골집에서 며칠을 머문다. 마당에는 들 작약과 장미가 심어져 있고 한편에서는 덩굴딸기가 익어가는 시골집. 살사 맘보 쥬크. 세 마리의 고양이가 함께 산다.






















나는 한국에서 왔어요.


오후 빛이 쏟아지는 창가 소파 자리에 살사라는 이름의 고양이 한 마리가 졸고 있는데 태오는 집주인 할아버지에게 고양이가 정말 귀엽네요.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한국에서 왔어요 라고도. 물론 프랑스 말로.


여기는 프랑스니까 사람들은 모두 프랑스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아빠는 어떻게 그렇게 찰떡같이 말을 알아듣고 얘기를 하는 걸까. 태오는 그런 아빠가 너무 멋지다고 칭찬을 했다. (물론 아빠는 영어를 썼지만 여기는 프랑스니까 아빠가 프랑스어를 했다고 생각하는 이 귀여움.) 태오는 자기도 아빠처럼 자꾸만 뭐라도 한마디가 하고 싶었다. 상점에서 나올 때 태오가 점원을 보며 씨유 어게인 했을 때 우리 다 같이 녀석의 귀여움에 웃고 말았는데. 사글사글 이야기도 잘 나누어주고 인상도 무척 좋은 이곳의 주인 할아버지를 만나니 아마 이때다 싶었던 모양이다.

태오가 내 어깨를 끌어당겨 아주 작은 목소리로 엄마 귀여운 고양이는 프랑스 말로 뭐야? 태오는 한국에서 왔어요는? 하고 묻고는 가르쳐준 단어를 몇 번이나 혼자 곱씹더니 불현듯 할아버지 뒤통수에 대고 동문서답처럼 터트렸다. 아 너무너무 너무나 귀여운 이 아이.







주인 할아버지는 1층에 사시고 고양이를 돌본다. 우리는 2층을 쓴다.

커다란 욕실과 한 편의 아늑한 거실. 방이 4개나 되는 제법 큰 공간. 4개의 방중에서 침대가 두 개인 아이방과 더블베드가 있는 부부방 이렇게 두 곳을 열어주셨다. 처음에는 이 숙소를 구하며 주인과 한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껴졌지만 이 역시도 남편의 설득을 받아들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정하고 재미있는 할아버지 덕분에 이 여행은 더 풍요로워졌다. 차려주신 프랑스식 귀여운 조식도 참 좋았지만 우리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시려는 모습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주인 할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아들들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한편에 고스란했다. 밤마다 아이들이 얼마나 재미있게 가지고 놀았는지. 영화 토이스토리에서 보았던 보드게임이 여기에 있다며 보드게임 수집가 재희가 정말 좋아했다.














1. 아. 삼각지붕 기울기 그대로 창이 난 2층에서 자보는 게 어렸을 적 꿈이었다는 남편.

    아이들보다도 더 아이처럼 좋아하던 표정을. 나는 오래 못 잊을 것 같아요.

2. 마당 그늘에서 쉬는 맘보.

3. 옆 집에 멋진 말을 키우고 계셨다. 덕분에 아이들은 매일 말 구경을 하러 갔다.

4. 이층 창을 열어놓고 구경하는 내 모습을 남편이 담아주었다.


















이곳에서는 사방 어느 곳을 보아도 지평선을 만난다.

창을 열자 멀리, 우리가 그토록 만나 보고 싶었던 몽생미셸이 거짓말처럼 서있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는 식당도 몇 없고 역시나 밤이 되기 전에 일찍 문을 닫는다. 식당 몇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 우리로 치면 읍내 같은 이곳이 너무 귀여웠다. 할아버지께서 소개해주신 카페에서 이곳의 명물이라는 애플 시드르와 도미요리를 저녁으로 먹었다. 애플 시드르는 탄산이 있고 단맛이 거의 없는 사과주인데 생각보다 도수도 높고 진한 향이 있어 다 비우지 못하고 맛을 보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머리와 눈을 달고 나온 도미 접시는 조금 충격적이었지만 생각 외로 담백하고 맛이 좋았다. 플레인 오믈릿을 메뉴판에서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음식이 입에 안 맞아 고생하는 재희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J'ai bien mange.

내가 잘 먹었습니다. 하고 서툰 불어로 인사를 건네었더니 카페 주인이 웃으며 내 발음을 고쳐주고는 고맙다는 뜻으로 좋은 술 한잔을 선물해주었다.





















저녁을 먹고 마을을 산책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섬으로 이어진 길에 내려 걷는 방법 외에 걸어서 섬으로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에는 모두 이렇게 펜스가 쳐져있다. 오랜 시간 찾아온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곳을 안전하고 깨끗하고 또 아름답게 지킬 수 있었던 방법을 알 것 같았다.




차를 타고 가다가. 또 걷다가 멈춰 서서 재희가 사진으로 담아달라 부탁한 순간들이 있다.

재희는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어쩐지 눈물이   같다고 했다. 그림 같은. 너무 그림 같아서 그렇게 밖에 표현할  없던 언덕 위의 풍차와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크기나 거리  무엇도 함부로 가늠하기 어려웠던 몽생미셸, 저녁 아홉 시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밝게 빛나던 보부아의 백야 같은 것들을.












Paris France. 19. juin

남편의 버킷리스트


글과 사진pomme soupe. 김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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