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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겨찾기 Nov 01. 2020

<멋진 신세계> - 불행해질 권리

올더스 헉슬리

도서실에 매주 갔더니, 사서가 내 얼굴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사서와 인사하고 얘기 나누던 중 책을 한 권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추천한 책이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였다. 그는 이 책이 최근 TV프로그램에 소개되어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멋진 신세계>는 조지 오웰의 <1984>, <동물농장>과 함께 미래 사회를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린 문학작품으로만 알고 있었다. 소설의 분위기를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고 대략적인 내용을 보고 들었기에, 언젠가 한번쯤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할 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그런 부류의 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유발 하라리의 책에 이 소설이 등장했다. 유발 하라리는 <멋진 신세계>가 그린 미래를 우리가 머지않아 맞닥뜨릴 사회로 보았다. 그가 이 책에서 발췌하여 그의 책에 인용한 부분이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기에, 꼭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가 아마 1년 전쯤이다.      


유발 하라리의 책에 발췌된 부분은 이렇다. -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서 발췌 부분에 조금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야만인은 현재의 인류다. 야만인은 우연한 기회에 야만인들이 사는 지역을 벗어나, 멋진 신세계에 오게 된다. 그는 멋진 신세계를 다스리는 총통을 만나서 말한다. - 영화 <설국열차>의 머리칸을 찾아간 송강호와 비슷하다.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지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영화 <설국열차> 중 머리칸에서 지도자를 만나는 장면

<멋진 신세계>는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여 모든 사람이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 미래사회다. 이 사회는 생물학과 신경과학이 고도로 발달하여 알파 플러스 플러스부터 엡실론까지 각 계급은 유전 형질에 따라 철저히 계획적으로 '배양'된다. 새로운 생명들은 태아 때부터 '수면교육'이라는 방법으로 그가 속한 계급에 맞는 가치관을 세뇌 받는다. 계급의 우열에 따라 지능과 외모가 달라진다. - 계급이 낮을수록 키가 작고 못 생겼다. - 심지어 특정 계급 이하는 똑같은 모습으로 복제되어 수십 명의 쌍둥이로 태어난다.     


이 사회는 체내수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라는 개념이 없고, 가족이나 연인이라는 개념도 없다. 모든 사람은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연애하며 성적 유희를 즐긴다. - 만인은 만인을 위해 존재한다.      

멋진 신세계는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곳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욕망과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있다. – 예를 들어, 가상현실과 같은 방법으로 정신적, 육체적 욕구를 해결할 수 있다. - 그럼에도 어떤 불만족이 있는 경우 ‘소마’라는 알약을 먹으면 모든 우울하고 불쾌한 감정이 해소된다. ‘소마’는 아편과 같은 일종의 환각제이지만, 아무런 부작용이 없고 기분이 좋지 않은 정도에 따라 적당량을 복용하면 된다.     


생물학과 신경과학이 고도로 발달하여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 과학의 힘에 의해 통제 가능해지는 사회. 이것은 바로 유발 하라리가 예견한 인류의 모습이다. 그에 따르면,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 덕분에 어쩌면 이른 시기에 실현가능할지도 모른다. 인류는 곧 노화를 방지하고 영원히 살며 머릿속의 어떤 버튼을 조작하여 ‘마음’을 조절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 그처럼 신과 같은 능력을 갖는 <호모데우스>라는 신인류가 탄생하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는 장면 전환이나 서사의 진행이 극히 영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여러 영화들이 떠오른다. 유전자가 인간의 능력과 가치를 결정하는 사회를 그린 <가타카>. 철저하게 통제된 계급 사회이자 모든 개인적, 사회적 행위가 통치자의 의도 하에 이루어지는 <설국열차>. 똑같이 생긴 난쟁이들 수십 명이 요상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까지 떠올릴 수 있다. 영화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가타카>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보면서 영화 제작자들이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었는지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가타카>에 나오는 인류의 미래나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등장하는 난쟁이들은 영화감독이 제 멋대로 상상해낸 것이 아니었다. - 이것은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한 장면, 복제된 인간들의 모습


야만인은 <멋진 신세계>에 들어가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야만인은 임종을 앞둔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그러던 중 그는 키가 작고 똑같이 생긴, 복제된 사람들(그들은 계급이 낮은 사람들이다)과 맞닥뜨린다. 그들은 죽음을 알지 못하고,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도록 교육받는다. 그들에게 야만인의 눈물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들은 야만인에게 다가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같은 묻는다.


“죽었나요?”


다른 사람이 와서 또 묻는다.


“죽었나요?"   


야만인은 그런 모습에 역겨움을 느낀다. 그들은 인간의 감정을 지니지 않았고, 죽음에 대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하고 객체로 전락하는 문제를 떠나 직관적으로, 그 자체로 너무나 거부감이 들고 불쾌하다. 이런 사회가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책의 전반적인 느낌이 불편함이다. 동시에 지금의 삶, 현재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방식에 안도하게 한다. 언제나 부족하고, 가진 것보다 가지고 싶은 것이 많고, 때로는 불행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있는 현재 삶이 더 행복해 보인다. 아마도 그것이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유발 하라리가 발췌한 부분을 보자. 총통을 만난 야만인은 불편한 것을 좋아하고, 안락함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야만인은 신과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한다. 불행해질 권리를 원한다. 그런데 만약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행해질 권리를 선택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어떠한 욕구나 욕망이라도 모두 쉽게 만족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달리 바라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탄력 있고 윤기 나는 피부,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 즐겁고 상쾌한 기분까지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거부할 사람이 있을까? 설령 처음에는 거부하더라도, 친구와 연인이, 혹은 철천지원수가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자신의 선택을 끝까지 고집할 수 있을까? <멋진 신세계>는 유발 하라리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미 우리는 과거에 비해 <멋진 신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보톡스를 맞아 한층 탄력 있는 피부를 유지할 수 있고, 질병에 저항하며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오래 산다. 가만히 있어도 기계가 다이어트를 시켜주고, 약물로 우울한 마음을 달랠 수도 있다. 지금은 부작용도 있고 한계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계와 약물을 무제한적으로 아무런 고통과 비용 없이 사용할 수 있고, 그것도 지금보다 훨씬 더 뛰어난 효능을 보인다면, 그런 기계와 약물을 거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안락함과 편리와 안정과 만족을 포기하고 ‘불행해질 권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결국에는 이러한 질문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만족과 안정 그 자체인가 아니면 거기에 이르는 과정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무언가 원하는 것을 가진 것인가, 가지지 않은 것인가. 우리의 삶이라는 것 자체가 수많은 부족함을 채워나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행복이나 불행을 느낀다. 부족함이 없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멋진 신세계>를 거부하고 불행해질 권리를 택한 야만인은 잘 살 수 있었을까. 이 책의 결론은 처참하기만 하다. 삶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하는 것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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