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ols (2023)
M3 맥북에어에서 가능한 것만 합니다. 컨트롤러로만 합니다. 싱글 플레이만 합니다.
|타이틀| 풀스 (Pools)
|최초출시일| 2023년 11월 2일
|개발사| Tensori
|유통사| Tensori, UNIKAT Label
|구입처| 스팀
|사용기기| M3 맥북 에어, 듀얼센스
리미널 스페이스
분명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요소로 채워져 있지만, 무언가 위화감이 들고 기이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 있습니다. 사람으로 붐벼야 할 곳인데 이상할 만큼 텅 비어있거나, 아무리 이동해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공간. 익숙한데도 낯설고, 현실 같은데 마치 비현실적인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런 공간을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라고 부릅니다. 2010년 전후로 괴담처럼 유행했던 것 같네요. 사실 예전부터 여러 창작물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새로운 개념은 아니지만, 여기에 이름을 붙이고 하나의 장르적 요소로 만들어낸 게 리미널 스페이스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은근한 위화감과 썩 유쾌하지 않은 괴리감을 직접 체험하는 게 핵심이기 때문에 최근의 유행 이후로는 주로 게임에 활용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풀스(Pools, 2023)>은 미로처럼 얽힌 거대한 워터파크를 배경으로 이러한 리미널 스페이스를 만들어낸 게임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타일 벽과 바닥과 물이 있는 공간처럼 보이지만, 계속 돌아다닐수록, 의중을 알 수 없는 기이한 구조와 설계가 계속해서 나타나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감을 점차 조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일상처럼 편안한 느낌과 기묘한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어요. 모순적인 감각들이 섞여 더욱 큰 위화감을 만들고, 그걸 느긋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게 이 게임의 매력이자 핵심입니다.
<풀스>에는 내용이랄 게 없습니다. 아무런 대사도 나오지 않고, 캐릭터도 없습니다. 그래서 굳이 길게 쓸 내용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요. 기본적인 장르는 일단 호러에 속하지만, 무서운 존재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가끔 귀여운 러버덕이나 플라밍고 튜브가 등장할 뿐입니다. 다만 무언가 어긋난 것만 같은 분위기 때문에 그저 평범하게 물에 떠 있을 뿐인 러버덕과 플라밍고 튜브마저 가끔 섬뜩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거고요.
총 6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각 챕터마다 조금씩 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습니다.
챕터 1 - 익숙하지만 기묘한 첫걸음
"비교적" 가장 평범한 수영장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분위기는 곳곳에서 느낄 수 있고요. 게임 전체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가 딱 세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챕터 1에 아주 잠깐 등장합니다. 처음으로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던 순간인 것 같네요.
챕터 2 - 세모와 네모, 그리고 러버덕
조금 더 미로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세모와 네모 표시를 기준으로 크게 두 개의 루트로 갈라지는데, 어디로 가든 결국은 한 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어느 쪽을 골라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 볼 수 있는 게 조금 달라지기는 하고요. 처음엔 이걸 몰라서 헤매게 될까 봐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챕터 3 - 비일상의 시작
다양한 공간과 비현실적 요소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전반적으로 밝았던 앞의 챕터들에 비해 어두운 공간도 많아지고요. 사우나도 있고, 알록달록한 튜브들도 잔뜩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상하기 짝이 없는 조각상도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나타나고요. 중간에 M.C.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의 그림 <상대성(Relativity)>을 연상시키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챕터 3에서 건너갈 수가 없더군요.
처음 할 때는 몰랐는데, 중간에 볼 수 있는 수조 속 거대한 조각상의 자세가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했을 때는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어서 상반신은 어둠 속에 가려 보이지 않았는데, 유튜브에서 다른 사람이 플레이한 걸 보니 거인이 허리를 절망한 듯 허리를 수그리고 이마를 짚은 자세로 앉아있더군요. 어떤 조건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고요. 업적 요소는 거의 무시하고 왔는데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챕터 4 - 계단과 미로, 그리고 거인들
다른 챕터보다는 더 입체적이고 복잡한 느낌이었습니다. 좁은 계단이 반복되는 곳이 있는데, 비슷한 공간이 연이어 나타나서 많이 헤매기도 했습니다. 계단을 무사히 탈출하고 나면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 중 한 곳이 등장합니다. 어두운 곳을 비추는 강렬한 조명 아래에서 거대한 얼굴과 손이 슬라이드 튜브를 삼키거나 손으로 잡고 있습니다. 약간 코스믹 호러스러운 분위기도 풍겨서 좋았습니다. 이런 공간이 이후에도 가끔 등장합니다.
챕터 5 - 리미널 월드
개성이 가장 강한 챕터였던 것 같네요. 일단 전후좌우뿐만 아니라, 상하로도 굉장히 넓고 웅장합니다. 발을 잘못 디디만 심연 속에 빠져버리는 곳도 많아지고요. 지금까지는 거의 대부분이 밝은 색 타일로 된 수영장이었다면 여기서부터는 붉은 벽돌로 된 수영장도 많이 등장합니다. 타일 수영장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인공적 느낌이 많은 공간이었다면, 벽돌 수영장은 왠지 더 오래된 것처럼 보이면서도 리미널 스페이스적인 분위기도 풍겨서 또 새로웠습니다. 이번에는 목재로 된 공간도 나옵니다. 여기는 왠지 일본 목욕탕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그리고 챕터 3에서 보고만 지나갔던 에셔의 <상대성> 계단을 지나갑니다. 여기서는 역시나 중력 방향이 장소에 따라 달라집니다. 앞에서도 중력 방향이 달라지는 곳은 있었지만, 대부분 완만한 경사에서 한 번만 달라졌다면, 여기서는 여러 방향으로 바뀌고, 몇 걸음만에 바뀌기도 합니다. 그래서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네요.
플레이할 때는 몰랐는데, 에셔의 계단에서 챕터 3 때 지나온 길의 입구를 보니 무언가 손 같은 게 튀어나와 있네요. 스크린샷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유튜브에 올려놓은 영상을 보니 분명 손이네요. 다만 움직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챕터 1에서 방향을 알려줬던 그 손일까요?
건조한 공간도 나옵니다. 리미널 스페이스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낡은 녹색 벽지의 공간도 나오고요. 길거리에 서 있을 법한 빨간 전화박스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있다면 상당히 무서울 것 같은 높은 높이의 워터 슬라이드도 있습니다. 이상한 줄무늬 공간도 있고, 심지어는 에스컬레이터도 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어두컴컴한 공간을 가로지르다 보면 기둥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집이 하나 보이는데, 여기 앞을 지날 때 처음으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무전기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이 가득 섞여 있어서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게임 전체에서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던 것 같네요. 집과 목소리.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지네요. 그곳을 지나면 또 하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이 나타납니다. 천장에 하늘을 그려놓은 돔과 그 아래에 놓인 집, 그리고 그 집에서 나와 수영장 모양의 심연으로 흘러가는 슬라이드 튜브. 여기에 묘하게 경쾌한 음악도 흘러나오고 있어서 리미널 스페이스다운 기괴한 위화감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챕터 6 - 리미널 백스테이지
<풀스>의 백스테이지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누가 살았을 것만 같은 기괴한 생활감도 찾을 수 있어서, 이 기묘한 공간을 만든 노동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유독 깊고 어둡고 넓은 인상이었네요. 침수된 마을이 등장하는데, 중간중간에는 반쯤 쓰러진 집도 보입니다. 홍수를 연상시키는 느낌인데, 주인공이 거대한 수영장에 갇힌 신세라는 걸 생각하면 왠지 의미심장하네요.
플레이어 외에 유일하게 스스로 움직이는 세 가지 중 두 가지가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먼저 침수된 공간 속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양. 그리고 수상한 조각상들을 만들어내는 공장. 이 공간을 지나면 역시 굉장히 인상적인 체스판이 나타납니다. 처음 봤을 때는 압도적이었는데 좀 살펴보다 보니 조금 심심해지긴 했습니다. 플레이어가 돌아선 동안 체스말 조각상들이 움직이거나 했다면 재밌었을 것 같네요.
여길 지나가면 벽에 그림이 잔뜩 걸린 갤러리에 도착하는데, 평범한 그림들 사이에 아이들 낙서도 섞여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가 눈에 띄며 궁금증을 자극했습니다.
어느 그림 아래에 쓰인 이름, 리지(Lizzy)는 누구인가?
다른 그림에 남겨진 저 사인은 누구의 것인가?
저 그림 속에서 모든 걸 연출하고 있는 듯한 저 손은 누구의 것인가?
갤러리를 지나 바닥 없는 심연의 가장자리와 미로를 지나면 끝입니다. 주인공의 아무래도 탈출한 것 같네요.
여기서 언급한 건 전체 공간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의 플레이 영상을 보니, 제가 가보지 못한 곳도 제법 있는 것 같고요. 소리까지 더해지며 더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도 있고요. 굉장히 다채로웠습니다.
관찰자의 책상
주인공의 책상에는 게임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던 조각상의 작은 모형과 '인체 해부학(HUMAN ANATOMY)' 책이 놓여있네요. 역시 책상에 있는 비디오테이프에는 '파운드 푸티지 - 33.1(Found footage - 33.1)', '조각상 만들기(Statue sculpting)', '레벨 188.8(Level 188.8)', '타일 수 세기: 파트 14(Counting tiles: part 14)', '수영장 만들기(Building pools)', '해결 중: 꿈에는 그림자가 없다?(Solving: No shadows in dreams?)' 같은 제목이 붙어 있네요. 티비 옆에 세워진 책의 제목은 '건축학: 꿈을 건설하기(ARCHITECTURE: BUILDING YOUR DREAMS)'고요. 티비 위에 걸려 있는 수영장 그림 구석에는 갤러리에서 보았던 사인의 일부가 보입니다.
주인공과 수수께끼의 수영장은 어떤 관계일까요? 시계나 그림, 집과 홍수, 지진 같은 과거의 어떤 순간이나 사건을 떠올리게 하려는 듯한 요소도 눈에 띄었던 걸 생각하면, 실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트라우마를 간직한 주인공이 기억이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공간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아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마지막 장면은 게임 개발자의 시선이고 플레이어는 여전히 개발자가 만들어낸 수영장에 갇혀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실제로 정체불명의 워타파크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것일 수도 있고요.
답은 없습니다. 리미널 스페이스의 재미는 목적과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데 있기도 하니까요. 분명 어떤 의도가 숨겨진 것만 같고, 여러 가지 흥미로운 가설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분명한 답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은 잘 만든 리미널 스페이스의 조건이 아닐까 합니다. 구체적인 설명이 붙는 순간, 신비로움이 사라져 버리니까요.
고요하고 차분한 기분전환
저처럼 게임에 재능이 없어도 2-3시간이면 끝낼 만큼 분량이 많지는 않습니다. 수영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녀도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고요.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자극하지도 않습니다. 스토리텔링이 없으니 중간중간에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어서 잠깐잠깐 하기에도 적당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을 소모하거나 긴장을 하지 않으면서, 또 괜한 행복감에 빠지 않으면서 기분전환을 하기에 좋았던 것 같습니다. 가끔은 고단한 작업 중에 기분전환을 하려고 무언가를 했다가,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일을 다시 손에 잡기가 어려울 때가 있지 않나요? 그럴 때 산책하는 기분으로 가볍고 차분한 기분으로 몰입하기에 적당합니다. 물론 진짜 산책을 나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바깥세상은 가끔 불쾌하거나 위험하기 짝이 없을 때가 있으니까요.
다음 게임
작년 말부터 이어졌던 거대한 마감의 연속이 어느 정도 해결되어서 여유가 조금 생기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밀린 일이 없는 건 아니라 마음 편하게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컨트롤: 얼티밋 에디션(Control: Ultimate Edition, 2020)>이 3월 말에 맥용으로 나오면 해볼까 하고는 있는데, 3월에도 마감이 남아 있어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풀스>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짧고 가볍게 할 수 있는 거라 가능했지만, <컨트롤: 얼티밋 에디션>은 가볍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원래는 2월 12일 출시 예정이었는데 2주씩 계속 밀리더니 지금은 3월 26일 예정입니다. 과연 제때 나오기는 할지. 레이 트레이싱을 강조하던데, 스펙적으로 너무 부담이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M3가 하드웨어 레이트레이싱을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맥북에어는 결국 '에어'니까요.
그러던 와중에 <바이오하자드 RE:3 (Resident Evil 3, 2020)>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맥용으로 나왔습니다. RE 엔진으로 만든 다른 바이오하자드 시리즈들이 큰 호평을 받은 것과는 달리, 3편은 빈약한 분량 때문에 욕을 먹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캡콤이 맥용으로 만들어주기는 할까 걱정했는데, 갑자기 깜짝 선물 같은 느낌이네요. 마침 할인도 하고 있어서 일단 구입해 뒀습니다. 조만간 질 발렌타인과 카를로스 올리베이라를 다시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