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겜알못의 게임로그#21:<스탠리 패러블:울트라 디럭스>

The Stanley Parable: Ultra Deluxe (2022)

by 해도연

겜알못의 게임로그

M3 맥북에어와 A17 Pro 아이패드 미니에서 가능한 것만 합니다. 컨트롤러로만 합니다. 싱글 플레이만 합니다.


|타이틀| 스탠리 패러블: 울트라 디럭스 (The Stanley Parable: Ultra Deluxe)

|최초출시일| 2022년 4월 27일

|개발사| Crows Crows Crows, Galactic Cafe

|유통사| Crows Crows Crows, Galactic Cafe

|구입처| App Store (iOS/iPadOS)

|사용기기| A17 Pro 아이패드 미니, 엑스박스 시리즈X|S 컨트롤러


<스탠리 패러블: 울트라 디럭스(The Stanley Parable: Ultra Deluxe, 2022>는 2013년에 출시된 <스탠리 패러블(The Stanley Parable)>의 확장판입니다. 2024년에는 아이폰/아이패드 용으로 출시되면서 제게도 이 게임에 대한 호평이 닿았고, 언젠가 해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처음엔 맥북 에어에서 플레이를 하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컨트롤러가 인식되지 않더라고요. 커뮤니티를 찾아보니 제법 오래된 문제였고, 윈도우에서는 해결되었지만 MacOS에서는 아직 아닌 것 같더군요. 결국 환불 신청을 했지만, 구입 후 2주가 지났으니 안 된다며 퇴짜를 맞았습니다. 할 수 없지요.


그래서 때마침 구입했던 아이패드 미니(A17 Pro)로 플레이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컨트롤러로요. 사실 몇 가지 이유로 지난 10개월 정도를 아이패드 없이 살았는데, 문제는 아이패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는 미니로 다시 구입을 했어요. 14년에 걸친 아이패드 이야기는 나중에 여담으로 써 보지요.

왼쪽: <스탠리 패러블: 울트라 디럭스>. 오른쪽: 김포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아무튼, 마침 장거리 출장도 잡히고 해서 이동 시간과 일과 후 시간을 활용해 <스탠리 패러블: 울트라 디럭스(이하, 스탠리 패러블)>를 플레이했습니다. 정말 재미있었고, 또 훌륭한 경험이었어요. 아무것도 모른 채로 플레이하는 게 제일 좋다지만, 그러면 아예 관심도 생기지 않을 수 있으니 스포일러를 가급적 자제하면서(없지는 않겠지만)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평소였다면 서사와 인물, 공간을 중심으로 썼겠지만, <스탠리 패러블>에서는 이 중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아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가겠습니다.


1. 스탠리는 빨간 문으로 들어갔어요

2. 나레이터, 나레이터, 나레이터

3. 스탠리 우화

4. 선택이라는 착각

5. 다음 게임?


1. 스탠리는 빨간 문으로 들어갔어요

게임은 나레이터의 신사적인 목소리로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는 스탠리라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스탠리는 큰 건물에 있는 회사에서 427번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427번 직원의 일은 간단했어요. 427호실 책상에 앉아 키보드의 버튼을 누르는 거였죠. 책상 위에 있는 모니터를 통해 어떤 버튼을 눌러라, 얼마 동안 눌러라, 어떤 순서로 눌러라 하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모두가 사라집니다. 스탠리는 텅 빈 사무실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회의실로 가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스탠리의 눈앞에 두 개의 문이 나타납니다.


스탠리는 회의실로 가보기로 했어요.
스탠리가 두 개의 열린 문 앞에 섰을 때, 그는 왼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어요.
회의실로 가는 길이 아닌 길

처음 플레이할 때는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보통 게임에서는 "경찰서를 탈출하라."처럼 직접적인 지시가 내려오거나, 간접적인 상황을 통해 어떤 행동을 유도하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플레이어는 대개 이를 따르고요. 이러한 지시가 교묘하고 정교한 연출, 그리고 약간의 선택지와 곁들여지면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이야기의 중심에서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마치 자신이 내러티브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거죠. 이게 바로 흔히 말하는 게임의 몰입감, 그리고 행위성(agency)입니다. 아마도요. 전 게임 전문가가 아니니까 너무 따지지는 말자고요.


아무튼, <스탠리 패러블>은 이런 행위가 실제로는 미리 설계된 궤도 위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들춰내며, 게임 속에서 우리가 느끼고는 했던 자유가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취약한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메타픽션처럼 게임, 특히 비디오 게임이라는 매체 자체에 내재된 모호한 주체성과 선택이라는 환상, 게임 내외에서 엮이는 개발자와 플레이어와의 밀접한 관계를 비롯한 다양한 주제를 두고 <스탠리 패러블>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진행됩니다.


이게 회의실로 가는 길이 아니란 걸 스탠리도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아직 나랑 뜻을 같이한다면 게임을 리셋하는 게 어때요?
그들에게 기초적인 1인칭 비디오 게임 역학을 이해시키고 비디오 게임의 서사적 비유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스탠리, 부탁인데, 당신이 선택을 해줘야 해요.


<스탠리 패러블>은 게임의 자율성과 행위성뿐만 아니라, 컷신 건너뛰기, 스팀 리뷰, DLC, 속편, 리메이크, 수집 요소, 업적 달성, 멀티 엔딩, 버그, 심지어 무료 체험 끝에서 마주하는 페이월까지, 현대적 게임 문법을 총동원하며 플레이어를 즐겁게, 그리고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제가 준비한 짤막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 더 스탠리 패러블: 울트라 디럭스를 정가 구매하시면 뭘 기대할 수 있는지 설명해 드리죠.
"건너뛰기 버튼이 있었으면."
스탠리, 이건 말이죠. 팬들을 존중하지 않는 탐욕스러운 게임 개발자들이 쉽게 돈 벌겠다는 마음으로 값싼 확장판을 출시할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요!
진짜 혁신적인 점은 이것들을 모두 수집해도 보상은 없다는 거예요. 이걸 다 모았으면 바로 별 볼 일 없는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거죠.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스마트한 솔루션을 설계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어요. 바로 스탠리 패러블 안심 양동이입니다!
“야. 너 청소도구함 엔딩 봤어? 청소도구함 엔딩 못 봤으면 아닥이지! ㅋㅋㅋ”
문을 다섯 번 클릭했다는 업적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캡션을 뭐라고 붙여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장면들

나레이터의 지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레이터가 시키지도 않은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전에 무슨 행동을 했는지에 따라 굉장히 다양한 전개와 결말로 이어집니다.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완결된 서사에 집중하는 걸 좋아해서 너무 많은 분기와 결말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높은 자유도를 가진 오픈 월드는 취향에 잘 맞지 않습니다. 오픈 월드만의 매력은 있겠지만, 틈틈이 짧은 시간 플레이할 수밖에 없는 제게는 오히려 집중에 방해가 되거든요. 부분적으로 오픈 월드 요소가 들어간 <섀도 오브 툼 레이더>도 그래서 쉽게 몰입을 할 수 없었고요.


하지만 <스탠리 패러블>은 달랐습니다. 하나의 결말을 보는데 짧은 건 4분 남짓이면 되고, 다른 결말도 서두르면 대개 10분, 길어도 20분 정도면 볼 수 있어요. 물론 곳곳에 준비된 수많은 변화와 변칙들을 찾아가다 보면 더 길어지기는 하지만요.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나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2. 나레이터, 나레이터, 나레이터

그런데 다양한 결말과 분기 자체보다 더 중요하고 재미있는 것은 그것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스탠리와 나레이터의 상호작용, 그리고 나레이터의 감칠맛 넘치는 대사와 목소리 연기입니다. 나레이터는 유쾌하면서도 얄밉다가, 괘씸하면서도 다정하고, 때로는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안돼. 그건 선택 사항이 아니었는데, 그걸 어떻게 했어요?
맙소사, 내 게임이 그렇게 싫은가?
이건 전혀 아니야. 벌써 여기에 와 있을 리가 없는데! 이러면 스포일러인데!
아, 이제 더는 못 참아. 그냥 접을래.
저와 당신 단둘이서, 예전처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거죠.
기계가 왜 작동했지? 누가 고친 거야? 여기 누가 있나? 누가 우릴 보고 있나?
설마 날 단지 음성 녹음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뭔가 이상해서 게임을 재시작했더니

몇 번의 분기와 엔딩을 보고 나면, 어느새 나레이터와 친구가 된 것처럼 정이 들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게임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아무래도 좋아지고, 그저 나레이터와의 상호작용을 즐기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나레이터를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레이터에게서 새로운 대사를 뽑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요.


거의 모든 대사가 재밌었다 보니 스크린샷을 계속 찍을 수밖에 없었는데, 같은 시간 동안 스크린샷을 이렇게 많이 찍은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에 인용문이 평소보다 많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고요. 더 넣고 싶은 것도 많고, 미처 스크린샷에도 담아두지 못한 대사는 훨씬 더 많습니다.

나레이터, 나레이터, 나레이터

게임을 마무리하고 시간지 지나니, 문득 그의 목소리가 그리워질 정도네요.


3. 스탠리 우화

사실 애초에 <스탠리 패러블>은 어떤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게임이 아닙니다(아마도요). 이 게임은 그저 비디오 게임이라는 매체에 던질 수 있는 온갖 질문을 던지다가 어느새 하나의 거대한 메타적 우화(parable)가 되어버려요. 그리고 좋은 우화는 언제나 질문과 생각거리를 던질 뿐, 답이나 교훈을 주지는 않지요. 그리고 스탠리 우화(Stanley Parable) 역시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저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 나레이터와 함께 고민하며 쏟아지는 유쾌한 풍자를 즐기면 되는 거죠.


저는 게임에서 진행에 영향을 주지 않는 수집 요소는 그리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탠리 패러블>에서는 최대 6개라는 스탠리 피규어를 26개 모았어요. 업적 달성도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별 의미 없는 업적을 8개 달성했습니다. 남은 3개 업적 중 두 개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모든 설정 요소의 모든 숫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바꿔보는 건… 차마 거기까지 무의미한 짓은 하지 못했네요.

<스탠리 패러블: 울트라 디럭스>의 업적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농담이기 때문입니다. 멋들어진 스티커가 붙은 거대한 양동이에 담긴, 거대한 농담이죠.


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무엇이 양동이고 무엇이 양동이가 아닌지 아느냐에 따라 달렸어요.


대충 서른 개 정도의 엔딩을 본 것 같습니다. 같은 엔딩을 향하더라도 그 사이에 다양한 분기와 변칙이 있었고, 그것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다회차'를 한 것 같네요. 아직도 보지 못한 엔딩, 분기, 변칙이 있는데, 이것들은 나중에 나레이터가 그리워지면 다시 해볼 생각입니다.


4. 선택이라는 착각

<스탠리 패러블: 울트라 디럭스>를 해보려는 분에게 한 가지 조언을 준다면, 처음에는 최대한 나레이터의 지시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엔딩을 한 번씩 볼 때마다, 끝에서부터 순서대로 나레이터의 지시를 거부하고요. 그러면 나레이터와 스탠리의 관계가 변화해 나가는 과정이 조금 더 '서사적'으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선택지가 많다 보니 중간에 꼬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마저도 어떤 '선택'이 정말 당신의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요.


어드벤처 라인(TM)과 친구들


5. 다음 게임?

글쎄요, 해야할 일이 이제 짧은 글 하나와 번역서 두 권이 남았어요. 회사 일도 있고 가족 일도 있고. 언제 또 게임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0월 31일에 <터미네이터 2D: 노 페이트(Terminator 2D: No Fate)>가 나온다는데 그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지금 머릿속에 있는 일이 예정대로만 진행된다면요. 지난달까지 머릿속에 있던 일은 이미 늦어지고 있지만요.




지금까지 플레이한 게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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