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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도연 Oct 27. 2023

2023년 세계과학소설컨벤션/월드콘 참가기

World Science Fiction Convention

(원래 브런치에는 작가 활동 관련 글을 쓸 생각이 없었는데요, 달리 쓸 곳이 없기도 해서 그냥 여기에 씁니다.)


하드코어 SF팬을 자처한다면 누구나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행사가 있습니다. 세계 과학소설 컨벤션(World Science Fiction Convention), 줄여서 월드콘(Wolrdcon)입니다. 전세계에서 SF 창작자와 팬들이 모여 SF 사랑을 쏟아내는 현장이죠. 코믹스 팬들에게 코믹콘이 있다면 SF팬들에게는 월드콘이 있습니다.

이번에 아주 좋은 기회로 제81회 세계 과학소설 컨벤션 혹은 청두 월드콘에 초청을 받아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후기를 남겨보려고 합니다.


월드콘이 18일 아침부터 시작되다 보니 출발은 17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중국어로 옮기신 이시아 번역가님과 전혜진 작가님, 김보영 작가님, 그리고 김초엽 작가님과 합류해서 중국 청두를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중국이라고 하면 가까운 이웃나라라는 인상이 있지만 땅이 넓은 만큼 4시간 뒤에야 도착했어요. 거기서 또 1시간 40분을 차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호텔에 도착하니 이번 월드콘의 마스코트라고 할 수 있는 로봇판다 ‘코모(Kormo, 科夢)’가 맞이해 주더군요. 호텔은 청용호라는 커다란 호수를 사이에 끼고 행사장인 과환(科幻=SF)박물관과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호수 너머의 과환박물관은 정말 호수에 내려앉은 우주선처럼 보였어요.

왼쪽: 로봇판다 코모, 가운데: 쉐라톤 호텔에서 바라본 과환박물관, 오른쪽: 과환박물관 항공사진(Zaha Hadid Architects (ZHA), ©ATCHAIN)
제가 모은 리본들

저와 전혜진 작가님은 한국SF 부스를 열었습니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의 중국어 작가자료집이나 뱃지, 책갈피, 스티커, 리본 등을 배포하고 한국 SF 책을 전시했어요. 월드콘에서는 여러 단체의 리본을 양면테이프로 이어 붙이는 전통(?)이 있는데요, 그래서 첫날은 리본을 자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전혜진 작가님은 리본에 붙일 양면테이프가 다 떨어져 문구점을 찾아 멀고 먼 원정길에 오르기도 하셨고요.


개최지가 중국인 만큼 방문자의 상당수가 중국인이었는데요, 케이팝 덕분인지 드라마 덕분인지 한국어를 하는 분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한국SF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도 많았어요. 전시해 둔 책들 중 번역된 게 있는지, 부스에 있는 책을 살 수 없는지 묻는 분들도 있었고 인터넷에서 구입하기 위해 제목을 적어가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한국 SF를 좋아하고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분이 제 책을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물었는데요, 중국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몰라서 그냥 여분으로 가져온 책을 한 권 드렸어요. 중국의 출판사나 에이전시, 영화사 등에서도 부스를 찾아와 한국SF에 대한 관심을 보이며 작가자료집을 받아가기도 했습니다.


부스에는 이제 곧 중국어판이 출간될 예정인 김보영 작가님의 “진화신화(On the Origin of Species and Other Stories)의 샘플북이 놓여있었는데 다들 갖고 싶어 했어요. 사실 배포해도 되는 거였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건 줄 알고 여기서만 봐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배포했다면 금방 소진돼서 더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김초엽 작가님을 찾았습니다. <우빛속>의 인기는 중국에서도 대단해서 언제 볼 수 있냐고 묻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이 사실은 19일에 진행된 제34회 은하상 시상식에서 김초엽 작가님이 최고인기외국작가상(最受欢迎外国作家奖)을 수상하시면서 증명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如果我们无法以光速前行)>를 번역하신 이시아(Li Xia, 필명 春喜) 번역가님은 은하상 최우수번역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작가와 번역가 모두 중국SF계의 인정을 받은 거죠. 특히 이시아 번역가님은 한국 SF를 중국에 알리기 위해 정말 다방면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노력해 주시는 감사한 분입니다.

왼쪽: 최우수번역상 이시아 번역가님(전혜진 작가님 사진), 오른쪽: 최고인기외국작가상 김초엽 작가님

은하상 시상식은 완전히 중국어로만 진행이 되어서 거의(혹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때그때 이미지 번역을 썼는데요, 그러다가 김초엽 작가님과 이시아 번역가님의 수상이 발표되자마자 보도자료를 내기 위해 이미지 번역 내용을 그대로 사용했다가 잘못 전달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당일이나 다음날에 나온 기사를 보면 김초엽 작가님이 최우수외국작가상을, <우빛속>이 최우수번역상을 수상한 것으로 나와 있는 게 있는데요, 정정하자면 김초엽 작가님은 독자투표를 통해 결정된 최고인기외국작가상을 수상하신 거고, 최우수번역상을 수상한 건 책 <우빛속>이 아니라 번역가 이시아 님이십니다. 나중에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에서 정정요청을 보내긴 했는데 정정보도가 따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작년에 정보라 작가님이 쓰시고 안톤 허 번역가님이 옮기신 <저주토끼(Cursed Bunny)>가 작가와 번역가가 함께 받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후보에 올랐을 때도 많은 뉴스와 기사에서 안톤 허 번역가님을 쏙 빼놓을 때가 많아서 아쉬워어요. 그래서 이번에 최고번역상을 받은 건 이시아 번역가님이라는 게 잘 강조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은하상 시상식 외에 청두 국제 SF대회 개막식과 청두 티안푸 SF 영화제 개막식에도 참석했는데요, 모두 중국어로만 진행이 되어서 사실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어요. 영어 자막이라도 좀 붙여줬다면 좋았을 텐데.


월드콘 개막식은 웅장했습니다. 공연도 화려했고요. 그리고 <삼체>의 작가인 류츠신의 중국내 인기가 정말 어마어마하더군요. 그래도 세계구급 작가들이 무대에 섰는데 류츠신이 무대에 오른 순간의 열기는 가히 압도적이었습니다. 류츠신은 월도콘 기간 중에 열린 수많은 행사 곳곳에서 모습을 보였고 그럴 때마다 엄청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요. 중국에서 진행된 행사라는 걸 감안해도 월드콘 기간 중 류츠신의 인기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왼쪽: 개막 공연, 가운데: 무대에 오른 <삼체>의 작가 류츠신, 오른쪽: 개막 선언의 순간

개막식 때는 바로 뒷자리에 일본 SF작가분들이 앉으셨습니다. 지난 4월 SF카니발 이후로 연락을 이어오고 있는 분들이었어요. 개막식 직전이라 좀 조용한 시간을 찾아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는데… 결국 마지막 날까지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없었어요. 초청자 호텔이 쉐라톤과 윈댐 두 곳이었고 저와 함께 간 작가분들은 쉐라톤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일본과 중국 작가들 대부분은 윈댐이라서 만나기가 쉽지 않았어요. 쉐라톤은 행사 구역 내부에 있었다 보니 주변에 식당은커녕 편의점 하나도 없었던 반면에 윈댐은 시내에 있어서 다들 저녁마다 상점가나 시장을 돌아다니셨다고 하더군요. 쉐라톤의 장점은 과환박물관과 가깝다는 것뿐…


18일에는 김보영 작가님의 강연, 김초엽 작가님의 대담이 있었는데 저는 이때 부스를 준비하느라 가지는 못했습니다. 19일에는 역시 김보영 작가님과 전혜진 작가님의 강연이 있었어요. 전혜진 다른 곳도 아닌 중국, 그것도 제갈량의 사당이 있다는 청두에서 삼국지와 한일SF의 관계에 대한 강연을 하셨는데요, 조금 걱정하시는 듯하였으나 오히려 강연 이후에 중국의 삼국지 팬들이 찾아와 강연 잘 들었다며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왼쪽: 김보영 작가님, 오른쪽: 전혜진 작가님

제 강연은… 어째서인지 일정이 전혀 전달되지 않고 있었어요. 월드콘 프로그램북도 이튿날 저녁에나 배부될 만큼 스케줄 관련 준비에서 문제가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관계자들도 정보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인지 다들 혼란스러워했어요. 그리고 저만 이런 게 아닌 것 같았고요. 그러다가 22일 오전에 김준녕 작가님과 같은 시간에 배정되었다고 들었는데 전 그날 새벽에 공항으로 가야 했고… 몇 번의 조율을 거쳐 결국 20일 오전으로 잡혔습니다.


그래서 20일 오전에 원고를 다듬고 인쇄해서 연습을 했어요. 한국 SF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이었고요. 그런데 강연장에 갔더니 뜬금없이 패널 디스커션인 겁니다?! 그것도 ‘비영어권 작가들에게 월드콘이 의미하는 것이라는 주제’로요. 혼란스러웠어요. 진행자를 포함해 패널이 총 8명이었는데 저를 포함해 적어도 3명이 저와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일정이 꼬여서 적당히 비슷해 보이는 곳에 집어넣은 것 같아요. 진행자도 어떻게든 굴릴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준비된 발표를 영어로 하는 것도 항상 어려운데 정해진 내용이 없는, 그것도 갑자기 주어진 주제로 디스커션을 하는 게 너무 어려웠고 결국 정말 아무말을 하다가 내려왔습니다.

준비한 강연은 못하고 뜬금없이 참석하게 된 패널 디스커션. 다들 친절한 분들이라 다행이었습니다.

20일 오후에는 한국작가들과 이시아 번역가님, 그리고 한국작가들을 담당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와 한국에서도 유명한 중국 시인 두보의 생가인 두보초당을 둘러봤습니다. 무후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느긋하게 보기는 어려웠지만, 두보초당은 정말 그곳에서 며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안순랑교(安顺廊桥)

저녁에는 월드콘 주최 측에서 제공한 진수이 강 투어를 했습니다. 자그만 배를 타고 강을 따라가면서 야경을 감상했는데요, 마르코 폴로가 <동반견문록>에 기록한 4개의 다리 중 하나인 안순랑교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리 위에는 고급 식당이 있는데 안내해 주시던 분이 우리가 오늘 저녁을 먹을 곳도 팬시(fancy)한 곳이지만 저 다리 위 식당은 레벨이 달라 우리는 가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때 동행했던 분들 중에 이번 휴고상 단편 편집자상에 후보로 올라간 셰리 토마스(Sheree Renée Thomas)도 있었어요. 이 분은 돌아가는 날 공항에서도 다시 만났습니다. 인천공향을 경유해서 LA로 가신다고.


이날 새벽에는 이시아 번역가님이 한국 작가들을 위해 파티를 열어주셨는데요, 저는 새벽에 깨어있기가 너무 어려워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커피를 때려 붓고라도 갈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지금도 들어요.


주최 쪽에서 20일에 하지 못한 강연을 21일에 다시 잡아주겠다고 해서 21일에는 계속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요, 아무런 소식도 없더라고요. 행사 관련 연락은 지정된 자원봉사자분들을 통해서 하는데 사실 이 분들도 일정 조율 때문에 너무 고생하시는 게 눈에 보였어요. 그래서 그냥 포기했습니다. 준비해 둔 ‘A Brief History of Korean SF’는 결국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뭐, 나중에 어디선가 쓸 일이 있겠죠.

왼쪽: 발표되지 못한 비운의 슬라이드, 오른쪽: 로버트 소여의 사인본

그래도 이때 대기하고 있던 중에 세계 3대 SF문학상인 휴고상/네뷸러상/캠벨상을 모두 휩쓴 로버트 소여(Robert J. Sawyer)가 근처를 지나가서 곧장 책을 산 다음 사인을 받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내님 선물용!


이시아 번역가님

21일 오후에는 이시아 번역가님이 참석하시는 SF 번역 관련 대담이 있었습니다. 완전 중국어로만 진행되어서 번역기로 겨우겨우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어요. 번역가를 위한 프로그램이 따로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좋은 취지였던 것 같습니다.


21일 저녁에는 대망의 휴고상(Hugo Awards) 시상식. 휴고상 시상식에 대한 감상은 간단히 털어놓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뜨겁고 거대한 SF팬덤이 존재할 수 있구나, 가능한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왜 SF를 사랑하는가, 나는 왜 SF를 쓰는가, 왜 쓰고 싶은가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조금 기가 꺾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과연 월드콘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기회가 온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열기를 끌어모을 수 있을까? 지금 한국에서 SF붐이 불고 있다고 해도 사실 절대적 규모로 보면 여전히 크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김초엽, 김보영, 정보라 작가님처럼 세계구급 작가들이 있기는 하지만 달리 말하면 소수의 작가에게 의존하고 있는 측면도 있고요. 아직 갈 길이 멀구나, 더 많이 길을 닦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왼쪽: 시상식 공연, 가운데: 시상식 시작, 오른쪽: 최우수장편소설 발표의 순간

휴고상 시상식에서 단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역시 언어였어요. 중국 인사가 수상 소감을 중국어로 말할 때 통역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떤 수상자는 그동안의 고생이 보상을 받았다는 것처럼 울먹이면서 소감을 말했고 중간중간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너무 아쉬웠습니다. 국제적인 시상식인 만큼 중영 통역가가 한 분이라도 계셨다면 참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이번 휴고상 트로피가 너무나 아름답고 귀여웠기 때문에 모든 것에 눈을 감아줄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포털에서 빠져나와 휴고 로켓에 손을 뻗는 은빛 판다라니!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서 기념품이라도 팔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왼쪽: 2023년 휴고상 트로피(출처: The Hugo Awards), 오른쪽 2023년 휴고상 트로피(출처: The Adelaide Fan Review)


휴고상 시상식이 끝나면서 제게 예정되어 있던 모든 일정이 끝났습니다. 월드콘 자체는 22일 일요일에도 진행이 되었어요. 김준녕 작가님이 강연을 하셨고, 김초엽 작가님은 월드콘과는 별개로 서점에서 사인회를 하셨고. 하지만 월요일에 출근을 해야 하는 회사원인 저와 전혜진 작가님은 일요일 일찍 돌아가야죠. 돌아가기 전에 그동안 현장에서 한국작가들을 성심성의껏 도와주셨던 자원봉사자 안천(顔川) 선생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고, 월드콘 전부터 저희를 위해 많은 고생을 해주셨던 이시아 번역가님께 참석한 작가&정보라 작가님의 사인과 메시지가 들어간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작가자료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새벽 2시에 일어나 공항으로. 비행기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서 집으로. 그렇게 밀도 높았던 월드콘 참석기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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