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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산타 Jan 21. 2024

싱가포르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깨달은 어떤 것

싱가포르로 교직원 연수를 다녀왔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기대감도 일부 있었지만, 나는 그보다 읽고 싶었던 책을 읽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오히려 더 크게 다가왔다. 비행기로 가는 시간이 무려 5~6시간이나 됐기에 책 한 권은 뚝딱 읽을 수 있겠다 싶었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감명 깊게 읽은 터라 그의 또 다른 소설인 '부처스 크로싱'은 그 기대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비행기 안에서 5시간에 걸쳐 부처스 크로싱을 읽고 바로 글을 핸드폰 메모장에 남겼다. 역시 윌리엄스의 소설은 기대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이었다. 


부처스 크로싱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가장 관심을 많이 가졌던. 나 자신에 대한 고찰.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은 뭔지. 나에게 가장 맞는 일은 무엇인지. 이러한 고민들에 일말의 실마리를 마련해 주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들을 강요하고 요구하는 타인과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서부로 떠나 겪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책의 주를 이룬다. 우리가 자아를 찾기 위해 성지순례를 떠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일 듯하다. 주인공은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푼 채로 지역의 인재들로 사냥대를 꾸리고 질 좋은 들소의 가죽을 얻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목마름과 배고픔 그리고 눈보라를 이겨내고 결국 원하던 바를 얻어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동료의 죽음과 이전과는 영락없이 달라진 들소 가죽의 위상이었다. 이 소설의 포인트는 망해버린 가죽 중개업자와의 만남 속에서 나온다.


자네는 거짓 속에서 태어나고, 보살펴지고, 젖을 떼지. 학교에서는 더 멋진 거짓을 배우고, 인생 전부를 거짓 속에서 살다가 죽을 때쯤이면 깨닫지. 인생에는 자네 자신, 그리고 자네가 할 수 있었던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자네는 그 일을 하지 않았어. 거짓이 자네한테 뭔가 다른 게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지. 그제야 자네는 세상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 그 비밀을 아는 건 자네뿐이니까.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어. 이미 너무 늙었거든.


여기서 말하는 '거짓'이라는 의미. 주인공이 끝에서 말하는 허영심과도, 그리고 꿈과도 일맥상통하다고 본다. 허영심은 내가 현재 갖고 있는 능력에 차마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 결국 거짓이라는 의미는 현재의 상황에 미루어 짐작하여 꿈꾸지 못할 것을 무리하게 꿈꾸고 있는 것. 지금보다 분명 나은 환경, 보다 나은 사람들, 보다 나은 나에게 맞는 일. 


이런 것들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이를 찾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들이고 기꺼이 신경을 기울이고 기꺼이 애를 쓴다.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지금은 할 수 없지만 나중에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일들에 힘을 쏟는다.


나도 그렇다.


독서를 하고 글을 쓰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항상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가 있다. 오직 그 행동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본다.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언젠가 현재 다니는 직장을 그만두고 소득 걱정 없이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얻는 것. 결국 독서와 글쓰기는 어딘가로 통하는 통로로만 작용할 뿐이고 그 언젠가를 위해 존재한다. 


5시간의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의 독서를 하면서도 애초의 그 목적은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목적의식'이 잠시 묻힌 순간들이 있었다. 온전히 이야기에 녹아들어 몰입을 한 순간이 있었다. 소설은, 문학은 그 몰입을 가능케 한다. 어떤 목적이 없이 어딘가로 나를 옮겨 놓아 스며들게 한다.


작가 온유가 쓴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이런 내용을 봤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왜 쓸모없어 보이는 문학을 하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쓸모가 있다는 것은 도구로써 작용한다는 것. 어떤 것을 위한 수단으로써 작용한다는 것. 나는 종종 어떤 삶의 진리를 찾기 위해 독서를 하곤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는. 나는. 어떤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서를 함으로써 나 자신을 옥죄고 채찍질하고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항상 그렇다.


어떤 보이지 않는 물건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면 마음이 조급해질뿐더러 그 물건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그 물건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다른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물건이 눈에 보이게 될 때가 많다. 책도 그렇다. 독서도 그렇다. 목적을 위해 독서를 하며 달리다 보면 오히려 목적은 흐려지고 어느 순간 사라진다. 하지만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독서에 온전히 몰입하여 그 행위에 집중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점차 또렷해져 보일 때가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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