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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드류 Feb 17. 2022

엄마 코트의 탈취제 냄새

중년, 여성, 퀴어, 성장물.

<윤희에게>의 수식어는 다양하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중년 레즈비언 성장물 정도로 표현되서는 안 된다.


<윤희에게> (2019)

"손에 물 안 묻히게 해 줄게" 그 뻔한 프로포즈 한 번 못 들어 봤는지 공장 구내식당에서 일하는 윤희의 손에는 물 마를 날이 없다. 이혼 후 딸과 함께 꾸려가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 입에서는 한 숨이 끊이지 않는다.


"잘 지내니?"

고지서와 전단지. 각종 의무와 상술만 가득하던 우편함에 따뜻한 안부 한 통이 도착한다. 겨울 냄새를 잔뜩 머금은 편지를 먼저 읽은 건 딸 '새봄'. 눈이 녹지 않는 엄마의 마음에 봄을 찾아주기 위해 '새봄'은 '윤희'를 편지의 발송지인 일본 오타루로 데려간다.


허리띠를 잔뜩 졸라 매야하는 넉넉지 않은 살림의 해외여행, '윤희'에게 오타루 여행은 24개월 할부 그 이상의 용기가 필요하다. '윤희'의 첫사랑에게는 향수도 아닌데 좋은 냄새가 났다. 편지의 발송인이자 향기의 주인공은 '윤희'의 첫사랑 '쥰'이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은 가족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고 '윤희'는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다. 대학에도 갈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오빠의 소개로 '인호'와 결혼한다. 딸 '새봄'이 태어났고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모든 날이 불행했던 건 아니지만 여분의 삶이 벌처럼 느껴졌다.


<윤희에게> (2019)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건 사랑과 하품이 다가 아니다. 부끄러운 상처는 숨기게 된다. 위로도 연민도 받을 수 없는 상처는 아무리 깊숙이 싸매도 티가 나기 마련이다. '윤희'의 상처는 사람을 외롭게 한다. 남편 '인호'는 한 번도 아내와 가까웠던 적이 없다. 언제나 침대 곁에 누워있는 건 외로움이었다. "사람을 외롭게 하는 사람"그게 바로 '윤희'다.


오타루에 간 '윤희'는 '쥰'의 뒷모습만 바라보다 쏟아지는 감정을 목구멍 끝까지 삼긴 채 발걸음을 돌린다.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산책도 하고 집에 놀라가고 싶은 그 마음은 스스로가 부끄러워 숨기며 도망쳤던 20년의 시간을 거스르지 못한다.


<윤희에게> (2019)

그럼에도 둘은 저녁 6시 시계탑 앞에서 만난다. 진한 포옹도 깊은 키스도 필요 없다. 그저 따듯하게 바라보며 이름을 불러주는 일. 원치 않은 이름을 붙여준 건 가족이지만 그 이름에 처음으로 의미를 불어 넣어주는 사람이 있다.  진심으로 행복하고 충만했던 시절을 함께한 두 사람은 주름지기 시작했지만 그 시간만큼 그리움을 더 짙어졌다. 눈 내리는 밤 잠깐의 산책으로 '윤희'의 겨울은 끝이 난다.


눈이 그친다고 꽃이 피는 게 아니다. 두꺼운 대지 속 겨울을 피해 잔뜩 웅크렸던 지렁이가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 작은 싹이 트기 시작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윤희'는 패딩보다는 코트와 가깝게 지낸다. 새롭개 출발하는 '인호'를 응원하고 오빠에게 작별 인사를 전한 뒤, '새봄'과 함께 서울으로 향한다. 예쁜 것만 찍는다는 '새봄'의 카메라는 이제 엄마 사진으로 가득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검붉게 가려진 가족이라는 존재에 우리는 부모의 불완전함을 알아채지 못한다. 아빠를 아빠로 엄마를 엄마로 대하는 건 쉽지만 아빠를 최석범 씨로 엄마를 손명희 씨로 대하기란 쉽지 않다. 두 분에게도 나와 같은 시간이 있었다. 비슷한 생각을 했고 비슷하게 아팠다. 나에게 <건축학개론>, <월플라워>, <문라이트>가 필요했을 때 엄마에게는 <윤희에게>가 필요했다. 어머니라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말에 가려진 그녀의 성장을 영화 <윤희에게>는 은은하게 얘기한다.


내가 태어난 직후 73년생 손명희 씨는 줄곧 엄마로 살아왔다. 두 아들의 어머니라는 역할에 걸맞게 그녀의 옷장에는 실용성만이 강조된 옷들이 가득하다. 두꺼운 잠바 사이 몇 안 되는 코트는 좀처럼 꺼낼 일이 없어 탈취제 냄새가 가득 베였다. 특별한 날 엄마에게는 탈취제 냄새가 난다. 그 냄새가, 모습이 낯설지만 엄마 코트의 탈취제 냄새를 더 자주 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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