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총 두 번의 연애를 경험했다. 한 번은 첫사랑, 한 번은 현재의 사랑.
사실 그 사이 한 명의 친구가 또 있었으나, 짧았던 연애 시간만큼이나 내 마음에 흔적조차 남길 새 없이 짧게 스쳐갔던. 사랑보다 우정에 가까웠던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래서 더 정확히 서술하자면 세 번의 연애이지만 나의 마음속엔 두 번이다.
20대 초중반, 나는 첫사랑과 혹독한 breakup을 치렀는데, 끝나버린 관계를 애도하고, 곱씹고, 괜찮아지고... 다시 마음이 건강하게 헤어 나오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우리가 만난 시간은 3년반쯤. 헤어 나오는데도 꼬박 3년 반이 걸린듯하다. 그 잔상이 아직도 가끔 내 주위를 기웃거릴 때도 있으니, 참 지독한 추억이다. 그렇지만 그도 그럴만한 게, 참 순수하고 좋은 우정과 사랑을 나눈 친구였다.
이별이 가르쳐준 것
그와의 이별은 참 혹독한 겨울과도 같았지만, 돌아보니, 그 이별 기간은 나에게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가르쳐준 시간이 되었다. 이별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나 스스로와 잘 보내는 법을 터득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을 거치며 내 안의 외로움과 고독과도 대면할 수 있었다. 고독해 본 사람만이 또 다른 고독한 이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음을 배워나가고 있다고. 사랑에 실패했고 또다시 어떻게 사랑할지 모른다 생각했지만, (또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이 혼자된 시간이 다시 더불어 함께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이. 이 시간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사실이 나를 참 많이 위로하였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참 강한 사람이고 멋진 사람이라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마침 이별한 때가 내면과 외면 모두 함께 성숙해가고 단단해지는 이십 대 중반인 시기에 맞아떨어져서 였을지도 모르지만, 이별 후 혼자 성취해 낸것들이 하나둘씩 늘어갈수록 나는 단단해져 갔다. 땀을 흘리며 장시간 등산을 하는 것도, 대학시절 금전적으로 부족해서 많이 망설였던 단/중거리 여행도 이젠 곧 잘 떠나고 즐기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관계를 돌아보니, 내 진심을 이해받지 못했다 생각했지만, 또 그만큼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도. 헌신적으로 사랑했다 생각했지만 나 스스로를 더 사랑했던 모습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다. 기억나는 것이 그 사람의 표정과 옷 등의 스냅샷보다, 내가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가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의 표정과 기분은 어떠했는지, 마치 희미한 구름에 쌓여있듯 기억이 잘 나질 않고, 나만이 뚜렷하게 기억되는 걸 보며 한편으로 참 씁쓸했다.
몇 년 동안을 걸쳐 깨닫게 된 단순한 이별의 이유
찬찬히 돌아보니, 맨 처음엔 우리의 직접적인 이별의 이유가 멀어진 장거리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믿음의 색깔 차이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나중에 어렵게 수긍하게 된 가장 단순한 이유는 우리는 맞지 않는 다른 두 사람이었다. 이야기는 많이 나눴지만, 서로가 원하는 것을 몰랐고, 끝내 맞춰가지 못했던 사람. 아니 맞지 않는 사람인데 오랫동안 왜 만났냐고?
파란 셔츠가 참 잘 어울렸던 그는 내가 대학교 시절 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가장 순수하게 사랑한 사람. 그래서 감정이 풍부했고 철이 없었고, 에너지와 아이디어가 넘쳤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한 번뿐인 life를 대하는 삶의 모습에 대해서도, 각자 공부하고 있는 커리어에 대해서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와 조언, 영감 등을 주고받았다.
이별 후, 나의 미련을 가장 오래 붙잡아 둔 이유도 그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참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오랫동안 떠나보내기 힘들었다. 좋은 사람을 가까이 두고 싶듯, 함께 하고 싶었는데. 세상에는, 안 좋은 사람이기에 나와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지만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배우고 인정하고 떠나보내기 참 힘들었다. 같이하면 참 좋은 시너지를 내겠다 싶었지만. 나의 욕심이었다. 맞지 않았던 타이밍이라고도 blame 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이별 후에도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이별 후 한번 다시 만났고, 또다시 깨어지기도 했으니까.
나를 가장 오래 붙잡아 둔 두 번째 이유는, 참 이야기가 잘 통하는 재밌는 친구였다. 나와 궁극적으로는 참 다른 사람이었는데, 인생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참 비슷했다.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새로운 것을 함께 배웠고, 실없는 농담이 재밌었고 진지해야 할 타이밍에는 진지하게 코드가 참 잘 맞았다. 이렇게 사랑이었던 동시에, 친구였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건 참 힘들다.
여기까지 읽으면, 그럼 왜 헤어졌어?라는 질문도 나올 법 한데. 음... 우리의 가치관, 인생 큰 방향의 다름도 다름이지만, 우리는 그토록 오래 연애하면서도, 서로 대화하는 법을 잘 몰랐던 것 같다. 다름으로 생기는 크고 작은 감정의 타래들을 잘 표현하고 해결해 잘 줄 몰랐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추상적이었고 그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서툴렀다.
또 나 스스로가, 상대방이 원하는 걸 몰랐다. 그리고 자주 생기는 다툼들은, 마치 세모를 동그라미로 만드려 하고 네모를 원형으로 바꾸려 하듯, 서로가 원하는 색깔과 모습으로 상대를 물들이려 했기에 둘 다 참 많이 힘들었다. (“for the better”) 자꾸 바뀌길 원했고 온전히 서로 자신이기 힘들었고, 인정을 원했지만 결국 상대방이 기대하는 모습에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는 결국에는 지쳤고 사랑은 식었다.
마지막으로는, 나는 사랑에 서툴렀다. 상대의 궁극적인 모습을 수용하고, 그의 방식을 인정해주는 마음의 여유와 그릇이 참 작았다. 내가 꽤 헌신적이었다 생각했지만, 그도 많이 참고 나로 인해 답답한 것들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때의 나의 모습은, 내가 돌아봐도 참 멋이 없었다. 그가 기대하고 꿈꿨던 연인과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으리라 생각된다.
그때와 다르고, 달라졌고, 같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이별은 필연적이었고, 필요했고, 그렇게 일어났다.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이걸 회고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나에겐 필요하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 시작과 끝을 제대로 celebrate 하고, 또 애도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대나무는 매듭을 지어야 성장한다고.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매듭을 지으며 성장을 한다고 말해주었다. 이것이 내가 매듭을 지어나가는 방식이다. 단순한 이별의 이유라고 제목을 지었으나, 꽤 긴 글이 나온 걸 보니 단순하지만 단순하지만은 않은 여러 겹의 감정과 추억의 타래가 얽혀있었던 듯하다. 이 글을 쓰며 회고함으로써 매듭을 지어보고자 한다.
또 이것을 곱씹는 건 중요하다. 과거의 추억들은 필요 이상으로 미화되기도 하니까. 그렇기에 기억의 불확실한 잔재들과 변덕스러운 나의 감정만으로 나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더 정확히는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의 나와 그와 나눴던 순수했던 시간이니까. 나는 계속 매듭을 지어가며 위로, 앞으로, 미래로 성장 중이다. (그도 그러하다.) 지금의 나는, (그리고 그는) 그때와 다르고, 달라졌고, 같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참 기쁘다.
나의 쿨하지 못한 성격 탓인지, 가끔 몰려오는 먹먹한 감정과 진하게 남겨진 미련의 마음이 슬쩍 나타나 노크를 할 때가 있는 것을 인정한다. 그럴 때는, 그냥 그 감정을 인정하고, 잠시 들여보낸다. 한동안 그 감정에 빠져있기도 하다가 다시 배웅하고 훌훌 보내고 털어버린다. 나는 감사한다. 내 인생에 사랑과 이별을 가르쳐주었던 첫 번째 사람에게. 그리고 아까 멘션조차 안될뻔한 두 번째 친구 에게도. (흔적이 없다고 했지만 나에게 소중한 교훈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시간들을 거쳐 걸어온 나와 지금 함께하고 있는 현재의 나의 사랑에게. 나만큼이나 소중하고 좋았고 씁쓸한 시절을 겪었을, 그래서 지금의 모습으로 나타나 함께하는, 지금의 그가 나는 참 많이 좋고 고맙다.
누군가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언젠가 사랑에 실패했던 자신의 모습 때문에 아직도 자꾸만 마음속에 바람이 분다면. 나에게 다시 사랑이 찾아올까? 간절히 믿고 싶지만 동시에 믿기 싫은 굳은 마음이 있다면.
당신에게 다시 사랑은 온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다른 모습과 색깔로, 방식으로, 오게 된다고. 기대했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 사랑을 낯설어하지 말고 많이 반겨주세요. 아마도 가장 따뜻한 사랑이 될 테니까. 그리고 그 사랑은 당신에게 사랑을 새로이 가르쳐줄 거예요, 걱정 말아요.
또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설령 또다시 사랑에 실패하더라도, 사랑은 다시 찾아올 거예요.